시詩 [133120] · MS 2018 · 쪽지

2011-11-28 00:3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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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 여기는 이국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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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이국의 수도
울지 마 울지 마 결혼반지 잃어버린 육십 넘은 동백꽃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내일 헐려나갈 천년 넘은 집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십수 년째 거짓말만 하고 있는 시인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이런 것도 눈 감는 거라고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건너가는 철새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포유류와 조류의 갈림길에서 어류와 갑각류의 갈림길에서 중세와 르네상스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틀린 결정만 해온 존재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여기는 이국의 수도 비가 온 지 십년도 넘어되었다네
이 도시의 연인들은 헤어진 다음에야 결혼하지
이 도시의 제사장들은 아들을 위해 물속으로 들어가고
제 시체가 물에 떠오를 때까지 기다린다네
푸른 구역에는 대추야자나무들 거꾸로 서 있고
내 아들은 무죄, 무죄, 라고 아비의 시체는 말하네
아무리 내가 저 몸을 이 생으로 삼고 있지만 저 몸이 죽은 후
물에 떠오를지 아닐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하여
이국의 수도에서 제사장은 언제나 유죄

내가 살아 있어 당신이 날 사랑해
당신이 살아 있어 나는 당신을 예뻐해
저 멀리 스텝을 열어 스텝의 극악한 심장을 열어 잊혀진 문명을 보여줘
어머 어머, 이런 망할 것 이런 것이 여기에 있다니 유죄
양고기 국물을 마시는 몸엔 무속이 깃들고
그러다 세상의 모든 죄를 사하겠다는
허영의 마술도 나오고 그러다
그 마술에 덴 몸은 얼마 남지 않았다, 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르는데

울지 마 울지 마
여기는 이국의 수도 오늘 시장에 폭탄이 터지지 않으면
내일 이 시장엔 오렌지를 가득 실은 수레가 온다네
그러니 울지 마 울지 마
당신을 버린 내가 성문 앞에 앉아 이름은 잊혀진 나물을 캐고 있다 해도
내가 버린 당신이 성 안에 앉아 그 나물에 법전을 고명으로 식은 국수를 드신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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