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앜합격이다 [400824] · MS 2012 · 쪽지

2012-02-23 00:13:27
조회수 7,985

고려시대 충혜왕.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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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이 6년 10개월인데, 그동안 한건 딱 하나뿐이죠.


날건달짓.



재위기간 내내 정사를
돌본적은 한번도 없음.

매일같이 여자를 옆에 끼고 내시들과 씨름을 하면서 내전에서 난장을 침.

선왕의 후비인 수비
권씨, 숙공휘녕공주 강간.(호적상 양어머니인데.)

같이 지내던 내시들의 부인은 당연히 강간.

대신들의 부인들도
납치해와서 강간. 심지어 재상의 부인까지 강간.

일단 부인을 강간하기 위해 재상을 해외로 파견보낸 다음에 야밤에 재상의 집에
침투해서 그 부인을 강간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이기도 함.

여염집을 뒤지고 다니다가 예쁜 여자 있으면 그냥 병사들 시켜서 포박한 뒤에
강간.

단지 자신의 연회장을 짓기 위해 아무런 예고나 사전작업도 없이 민가 100채 철거+그 근방 주민들 사역에
동원.

비둘기 잡으러 절간 지붕에 올라갔다가 못잡음->빡쳐서 절간 전체를 불질러서 태워먹음.

자신의 속마음을
엿본다며 사관들을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정말 명백하게 드러난 강간사건일 뿐.

충혜왕이 정확히 몇명의
여자를 강간했는지는 헤아릴수도 없음.

상습적으로 열약이라 불리는 정력제를 복용해서, 충혜왕이 강간한 여자들은 모두 임질에 걸렸다고
함.




임금이 이모양이니 대신들도 개판.



대표적인 일화 한가지.

충혜왕이
어느 대신의 아내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휘하 비장을 시켜서 그 여자를 납치해오라고 함.

근데 그 비장이 여자를 납치하는 과정에서
먼저 그 여자를 강간함.

충혜왕은 '이자식이 나도 못 범한 여자를 먼저 범해?' 하면서 그 비장을 몽둥이로
때려죽임.

그리고 그 비장이 납치해온 여자를 강간한 뒤, 자신이 때려죽인 비장의 원래 부인을 찾아가서 다시
강간함.



임금꼴이 이모양이니 불량배들이 왕을 자처하며 여자를 강간하는 사태도 하루가 멀다하고
발생.



결국 자기가 강간한 양어머니, 숙공휘녕공주가 원나라 왕실에 충혜왕의 막장짓을 고발함.

원나라에서도
'어지간하면 봐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되겠다.' 하면서 충혜왕을 잡아다가 압송.

하지만 대안이 없어서 몇년후 다시 고려로
돌려보냄.

돌아온 충혜왕은 지금껏 참아온 포텐셜을 모두 터트림.

또다시 엄청나게 많은 여자들을 강간하며, 새로운 궁궐을
짓겠다고 막대한 세금을 걷음.

결국 새 궁궐을 짓자마자 나라는 파산. 이 꼴을 보다못한 원나라 왕실은 충혜왕을 재압송해서
독살함.


이분은 진짜 레전드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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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니스트가고싶어용 · 388352 · 12/02/23 00:16

    모본왕돋네

  • 외교대통령 · 368294 · 12/03/10 01:05 · MS 2011

    모본왕 까지마삼 중원정벌의 위엄 ㄷㄷ
    모본왕의 경우 연맹국가 체제에서 불리한 기록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 다른세상 · 345501 · 12/02/23 01:40 · MS 2010

    원나라가 도와주는 말도 안되는 케이스라

  • messiah. · 268337 · 12/02/23 01:55 · MS 2008

    저번에도 올라온 글인거같은데 ...
    역사는 99.999%승자 기준에서 쓰이기때문에 저 텍스트는 거짓일확률이 높습니다.
    승자인 원나라에서 패자인 고려를 좀더 합당하게 다스리기 위한 거짓기록이란거죠.
    너네 왕이 저런호놀ㄹ루같은놈이니 우리 원이 더 다스려야것다~ 와 같은거라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를듯

  • 부앜합격이다 · 400824 · 12/02/23 01:58 · MS 2012

    근데 이분은 레알인 게, 이분이 승하했다는 소리가 고려에 전해졌을때 백성들이 기뻐서 지은 민요도 있을 정도니깐요.
    아 그리고 '충'자 들어간 왕들은 엄마가 원나라 공주이기때문에, 사실상 원나라 황족이었죠. 그러니깐 원나라 통치의 정당성을 지지하기 위해 지어냈다고 보긴 어렵죠.

  • 부앜합격이다 · 400824 · 12/02/23 02:02 · MS 2012

    아래 글은 어떤 학자가 충혜왕에 대해 쓴 글인데, 참고해보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1.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어둠의 군주로 순위를 매긴다면 1위는? 단연코 그 불명예는 충혜왕 몫일 것이다.

    폭군의 이름은 성군의 이름보다 더 매력적이어서 줄줄이 남겨지지만 충혜왕은 어찌된 일인지 자신의 업적(?)에 비하면 숨겨진 인물이 되었다. 차마 입에 담긴 힘든 극치의 폭주를 보여준 그 패륜돋는 행동때문이기도 할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야사에 탐닉하는 얘기꾼들의 먹잇감이 되어 이름을 남기는게 통상적인 일일터인데도 그의 이름은 수면아래 가라앉아버렸다. 왜일까?

    그 이면에는 그의 실패를 감추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통의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충혜왕은 부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골방에 숨겨놓고 없는 듯이 존재감을 지워버리고 싶은 인물이었다. 이쯤되면 충혜왕에 대해 궁금해지지 않는가?

    2.

    충혜왕의 아버지 충숙왕은 충자임금시대가 거듭되던 원나라 간섭기의 절정인 1313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가 충선왕이고 할아버지는 충렬왕. 그것은 다시 말해 어머니도 할머니도 몽골족 공주란 의미였고 이미 세계제국을 이룬 원나라의 위세가 등등하던 때였으니 충숙왕은 어느것하나 모자랄 것도 없이 자랐다. 말그대로 시루속 콩나물이었다. 그런 충숙왕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것은 아버지 충선왕이었다.
    충선왕은 세자시절부터 고려말 극에 달한 민중들의 고통을 눈에 보면서 자랐기에 개혁에 누구보다 열을 올렸다. 고려시대 세종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귀족의 힘에 맞섰던 충선왕의 좌절감은 그래서 그만큼 더 깊고도 깊었다. 귀족, 신귀족으로 점철되어 온 고려사회가 일개 왕의 젊은 혈기로 바뀔리는 없었다. 왕은 무고로 원나라에 끌려갔고 다시 충렬왕이 왕위에 올랐다. 한 나라의 왕위계승서열이 이렇게 바뀌는 것이 바로 원간섭기였다.


    어찌되었든 충선왕의 원나라 행은 뜻하지 않은 대박을 터뜨렸다. 귀양살이나 진배없던 대도에서의 생활중에 친하게 지내던 왕자가 후에 원나라 황제가 된 것이다. 이리하여 삼국통일로 잃어버렸던 요동반도가 고려차지가 되었다. 충선왕은 심양을 다스리는 심양왕의 자리를 보상으로 받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들은 모두 친척관계였으니 원나라에서 충선왕의 처지는 나쁠리 없었다. 어떻든 충선왕은 어머니도 아내도 원나라 공주였으니까 말이다. 전세계를 지배한 원나라의 외손자이자 부마였으니 국제귀족으로서 호사를 누릴 수 있었고 권력의 정점인 원나라 황실과 연줄을 댔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충선왕은 이런 생활에 인이 박혀서 다시 왕이 되었으나 귀국하지 않았다. 고려에서 세금만 꼬박꼬박 받아먹으며 나라의 곳간을 탕진하다 무종이 죽자 그도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되어 죽었다.



    그렇게 충선왕은 세종이 될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박차버렸다. 그러나 더 치명적인 실수는 아마 자신의 아들 충숙왕보다 조카인 고를 더 아꼈던 데 있었다. 충선왕은 고려는 충숙왕에게 심양은 조카 왕고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로서 고려 조정은 본의아니게 이중권력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결과는 뻔했다. 고왕을 지지하는 쪽과 충숙왕을 지지하는 쪽이 충돌, 충숙왕은 재위 내내 고왕을 지지하는 일파의 견제에 시달렸다. 이중권력의 해소는 심양땅과 고려를 동시에 한 임금이 다스리는 수밖에 없었다. 충선왕이 만일에 두 곳을 전부 충숙왕에게 물려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거저 들어온 요동땅이 그 결정하나로 날아가버린 걸 생각해보면 충선왕은 여러 가지로 그저 아쉽고도 또 아쉬운 임금이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이겠지만....)


    '충'자가 붙은 임금들의 비극은 모든 권력의 정점에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나라 간섭기의 임금들은 원나라가 기침만 해도 벌벌 떨어야 했다. 심양왕파들의 끝없는 모략은 결국 충숙왕이 원나라 수도인 대도(지금의 북경)에 들어가 재판을 받아야 했다. 한나라의 왕의 처지가 처량하기 한이 없었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는 동안 심양왕파인 조적일당은 차츰차츰 고려왕파의 수족들을 잘라나갔다. 그렇게 신하들은 하나 둘 등을 돌려버렸다. 귀국한 왕은 왕은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심양왕에게 왕권을 넘길 생각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춤추며 놀기 시작했다. 왕의 슬픈 춤사위를 바라보며 충혜왕은 사춘기를 맞아야 했다.



    마침내 충혜왕이 정치가 가능한 나이가 되자 충숙왕은 왕위를 넘겨버리고 원나라로 가버렸다. 친왕파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불안한 고려조정을 물려받은 15살의 충혜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3.



    아직 여드름도 채 가시지 않은 앳된 충혜왕이 왕좌에 앉았을 때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결국 모든 성공의 조건이 이 스트레스 해소를 얼마나 적절하게 해주느냐에 있다는 것을 그는 온몸으로 보여준다. 권력은 그만큼 스트레스를 가져다 주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만큼 스트레스를 다스릴 수 있어야 성군이 되는 법인 것이다. 하지만 충혜왕은 폭군의 길을 걸어버렸다. 왕은 여색을 지나치게 탐닉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영웅은 호색이라고도 했던 시대였으니 그냥 여색을 탐했다면 아무 말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 충숙왕에게 등을 돌리는 귀족들을 보고 자라며 입술을 잘근잘근 물면서 복수를 꿈꿨다. 친왕파는 거의 없어졌고, 원나라와 친원-친심양왕파 귀족들로 득실거리는 궁궐에서 사춘기를 맞이한 왕은 분노를 억제하는 법을 배울 길이 없었다. 어린 그에게 그것이 정치의 생리란 걸 어찌 납득시킨단 말인가.


    마침내 쓸개를 씹는 듯 귀족을 향해 이글거리는 눈빛을 날려대던 충혜왕이 왕좌에 올랐다. 당연하겠지만 귀족들에 대한 노골적인 분노를 드러냈다. 여색을 탐한 충혜왕의 여인들은 아름다운 여인이거나 궁중의 여인이 아니라 바로 귀족의 부인이고 딸이고 며느리였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분노의 폭발이었다.



    밤에 왕은 궁궐을 나오고 개경의 집은 분주해졌다. 일단 왕이 나타나면 귀족의 아내건 며느리건 딸이건 계집종이건 남아나지 않았다.



    귀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고, 원나라는 그를 체포해갔다. 충혜왕은 보위에 오른지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원나라에 끌려갔고, 충숙왕이 다시 복위했다. 원나라로 간 그는 증오의 감정을 채우고 왔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예민한 촉수를 가졌는지 보여준다. 원나라 간섭기인 고려의 적은 원나라와 그에 결탁한 귀족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비타협적인 왕의 전투력은 그를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원나라의 인질로 끌려가 친원파로 길러졌던 그의 동생 강릉대군(공민왕)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으니 형제의 능력도 인품도 처세술도 하늘과 땅이었다.



    4.

    때때로 사냥하고 밤마다 허깨비같이 춤만 추던 충숙왕은 4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충혜왕은 다시 왕위에 오를 채비를 했다. 물론 원나라에선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충숙왕이 유언을 남긴 터라 모든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제 두려울 것이 없는 충혜왕은 자신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원나라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과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결국 충숙왕의 부인인 경화공주를 겁탈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만다. 경화공주는 원나라 공주였으니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심양왕파였던 조적이 충혜왕을 징벌하여 인륜을 바로잡겠다고 난을 일으켰으나 간단히 진압되었다. 충혜왕이 무능력한 군주가 아님이 드러난 셈이다. 폭군으로서 그가 이례적인 점이 그것이다. 심복을 고르고 키우고 지키는데 능했다.

    반대파들로 장악된 왕실, 춤만 추는 아버지를 보면서 충혜왕은 좌절하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그는 왕실의 후계자. 언젠가 제 손에 왕권이 들어올 것이다. 그날을 기약하며 조용히 친구들을 모았던 것이다. 그들이 ‘악소’즉, 젊은 무뢰배다. 가난하고 비참하게 자란 소년들은 충혜왕의 수족보다 더 충성스런 신하였고, 왕을 따라 성장하여 청년이 되었다.

    이들은 매를 키우는 ‘응방’소속의 젊은이들로 사냥을 즐기는 충혜왕이 그걸 구실로 응방의 돈을 쓰며 직접 키운 사병집단이었다. 늘 사냥을 가노라며 심산유곡을 찾아 이들을 단련시킨 결과 충혜왕을 무력으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충혜왕은 다시 원나라로 끌려갔다. 아무리 악소라도 그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원나라에선 경화공주사건을 문제삼아 왕을 가두고 심문했다. 이것은 충혜왕의 마음에 다시 하나 더 분노의 대상을 만들어냈다. 바로 지식인. 그리고 이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이전의 모든 조건들은 그저 그가 인간적 트라우마가 있는 불행한 사람정도로 머물게 하였다면 이것은 그를 어둠의 군주에서 실패한 어둠의 군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심지어 폭군의 리스트에서도 그를 영원히 지워버리게 만들었다. 지식인들의 증오를 불러일으킨 죄이다.

    (이 지식인을 키운 것이 할아버지 충선왕이었다. 충선왕은 개혁이 좌절된 후 귀족의 대항마로 신지식인을 키워냈다. )



    지식인들은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들려 갈 때마다 군주답지 못한 일들을 조목조목 알렸다. 당연히 유학자들인 그들에게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나라는 바로 설 수 없었다. 임금의 도덕성.그것이 무너지면 얼마나 많은 댓가를 치러야 하는지 그들은 똑똑히 보았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지식인들을 설득하기보다 탄압하는 것, 그것은 충혜왕에게 마지막 실패의 조건이었다. 결국, 충혜왕에겐 악소만 남았다.



    5.



    인간적으로 도무지 용납이 안되는 패륜군주였으나 그는 상당한 능력을 가진 군주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어쩌면 그 능력이 그를 폭군으로 몰아넣은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역사가 가르쳐준 진실 중 놀라운 사실 하나가 이재에 밝은 군주는 실패한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충혜왕은 돈 되는 일을 알아보는 안목하나만은 기가 막혔다. 국고는 왕실의 소유였으니 그는 이곳을 채우는 남다른 재주를 가졌다. 시장에 내다팔거나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으니 나라의 세금을 부풀리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재주로 국민연금을 운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싶다. 하지만 그가 부풀린 곳간은 왕실, 즉 자신의 곳간이었고 그 곳간의 원금은 백성들의 혈세였고, 손실도 백성 몫이었다.




    특히 얼마나 그가 파격적인 이재꾼인지는 세 번째 왕비를 보면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엔 왕비가 될 수 있는 가문이 정해져 있었다. 귀족국가다운 방식이었으나 그는 이 룰을 깨고 일개 상인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그의 치세동안 배를 불린 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심복,그리고 왕과 결탁한 상인들이었다.



    이재에 밝은 상당한 능력을 가진 충혜왕이 만일 개성의 여느 상인이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것이다. 우린 역사에서 어느 거상의 이름 하나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권력이 주어지자 그의 능력은 모두를 괴롭혔다. 아무도 믿지 않아 심복인 악소집단만을 믿었고, 지식인과 반대파에 대해서는 패륜적인 범죄도 서슴지 않았다. 그 결과 역사책은 그의 이름을 거론조차 하지 않는 철저히 무시당하는 투명군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 My Chemical Romance · 251955 · 12/02/23 18:49 · MS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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