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샴 [323635] · MS 2018 · 쪽지

2012-03-04 20: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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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노름꾼의 아이콘 [파락호 김용환].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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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1946

조선시대 후기, 일제강점기의 유명한 도박꾼이자 파락호.

경상북도 안동 일대에서 알아주는 명가였던 의성 김씨 종가의 장손으로, 조선시대의 의병장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이기도 했다.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다고 하며,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걸고 마지막 배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다고.

만약 배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배팅이 실패하면 “새벽 몽둥이야”하고 큰소리로 외쳤는데, 이 소리가 나오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자루에 쓸어담아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집안의 엄청난 재산과 전답을 도박으로 말아먹고(현재가로 약 200억 이상), 문중의 자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 다시 종가에 되사주곤 했다고 한다. “집안 망해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

외동딸이 시집을 갈때 시댁에서 장롱을 마련하고 준 돈 역시 도박으로 탕진, 결국 외동딸은 친정 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들고 울면서 시집을 갔다고 한다. 게다가 시댁의 가세가 기울자 그 헌 장롱이 귀신들린 장롱이라고 해서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기까지 했다고.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며 절대로 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인물.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페이크였다.

그의 진정한 정체는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군에게 독립자금을 모아서 전달하던 독립투사였던 것이다.

그 막대한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한 것으로 위장해서, 모두 만주로 보냈던 것이다. 타락한 모습을 보인 것도 결국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본래 그의 할아버지와 그 형제들이 조선말기 의병장 출신이라 일제의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집안이었기에, 이토록 소름끼칠 정도로 철저한 자기위장을 했다. 딸이 시댁에서 장롱 사라고 받은 돈 역시 독립운동 자금으로 만주로 보냈다.

임종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 해도 되지않겠나?"고 하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없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막대한 재산을 버리고, 명문가 장손이라는 명예도 버리고, 주변사람들에게는 파락호라고 경멸받고, 심지어 하나뿐인 외동딸에게 원망과 미움을 받으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진정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걸맞는 분이라 하겠다.

김용환 선생의 외동딸 김후옹 여사는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는다. 훈장을 받는 그 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 라는 글로 발표한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 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데





당시 도박하면 패가망신한다는 예로 김용환이 자주 언급 되었었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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