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소졸 [383625] · MS 2011 · 쪽지

2012-03-25 10: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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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과 PD의 뿌리를 찾아서... (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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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이나 PD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닙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은 서울대 사회대와 인문대로 귀결이 되는데요.

최대한 간단하게 말해, 서울대 사회대의 '한국 사회 연구회(한사연)'과 인문대의 '한국 문학 연구회(한문연)'가 지금의 NL와 PD의 모태가 된다고 할까요.

한사연이 '현장론'을 주장했고, 한문연이 '정치투쟁론'을 주장했는데, 쉽게 말해 현장론이란 민중, 학생회의 등의 현장을 통해 조직을 다지며 독재와 싸우자는 온건 노선이었고, 정치투쟁론은 시위와 직접적 투쟁을 통해 민주화를 꿈꾸는 강경 노선이었습니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현장론은 '단계적 투쟁론'으로, 정치투쟁론은 '전면적 투쟁론'으로 발전하고,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온건파인 단계적 투쟁론 세력이 세를 주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80년, 역사적인 '서울역 회군' 사건이 일어나게 되죠.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단계적 투쟁론자들은 회군을, 전면적 투쟁론자들은 진격을 주장하며 첨예하게 대립했으나 결국 조직에서 앞선 단계적 투쟁론자들의 뜻대로 회군했고, 그리고 광주 사태(광주항쟁)가 벌어집니다.

80년대 학생운동은 사실상 ‘광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광주항쟁은 학생운동사에서 일종의 터닝포인트 역할을 했습니다. 본격적인 반미 흐름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게 미국이 군부의 광주진압을 묵인했다는 이유 때문이었고, 또한 이는 훗날 대학가에 주체사상이 빠르게 퍼지는 데도 한 몫 합니다(주체사상이야말로 한반도 땅에서 미제를 몰아내고 자주통일을 이룩하여 민족해방을 달성, 현실의 모순을 모조리 깨부술 수 있는 강력한 이론이었으니까요).

이후 80년대 초반부터 중반에 이르기까지 양측은 무림vs학림 논쟁, 야비vs전망 논쟁 등으로 대립하는데 결국은 단계적 투쟁론과 전면적 투쟁론으로 귀결됩니다. 무림 - 야비, 는 시위 만능론을 경계하면서 운동권이 학생, 민중 사이로 파고들어 조직을 갖추고 쉽게 무너지지 않을 자생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고, 학림 - 전망, 은 당장의 정치투쟁을 멈춘 채 현실을 방기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선도적 정치투쟁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83년, 5공에서 학원자율화조치를 펴면서 소위 유화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이로 인해 대학가의 운동권들은 양적, 질적으로 팽창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펼쳐진 논쟁이 바로 MTvsMC 논쟁, 이른바 깃발vs반깃발 논쟁입니다. MT는 '민주화 투쟁위원회'와 '민주화 투쟁 학생연합'의 머릿글인 '민투'의 약자로 학림 - 전망을 계승한 세력이었고, MC는 ‘Main Currents’의 약자로 무림 - 야비를 계승한 세력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서울대 프락치 사건과 서울대 도서관 점거 농성(MC 주도)이 있었는데 두 사안에서 실패한 MC는 MT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습니다. 학생회 주도의 운동, 이른바 단계적 투쟁론으론 승산이 없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됐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MT가 승리함으로써 이후 학생운동에서 전면적 투쟁, 즉 '시위'의 비중이 커집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일어났던 논쟁이 CNP 논쟁, 소위 사회구성체(사구체) 논쟁인데... 고 김근태씨가 의장으로 있던 민청련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진보계열 운동권의 이론적 성향을 정리하여 발표한 것이 촉진제로 작용했습니다. 이른바 'NDR(민족민주변혁)', 'CDR(시민적 민주변혁)', 'PDR(민중민주변혁)'로 나뉜 세 변혁이론에 자리를 잡은 각각의 진영에서 논쟁에 참가했고, NDR이 논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MT와 MC 계열로 나뉘어 대립하던 학생운동권들도 절충하여 NDR의 기치 아래 하나로 모이게 되는데, 이게 '삼민투(민족, 민주화, 민족자주통일을 위한 투쟁위원회)'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시기는 학생운동권의 양적, 질적 팽창 시기였는데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대략 3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5공의 학원자율화조치로 대학이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둘째 85년 총선에서 양김을 앞세운 신민당이 제1 야당으로 올라서면서 재야세력, 운동권에 힘을 실어주었으며, 셋째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 등의 사상과 이론을 담은 원전들이 대량 출판, 유통되어 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유화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대학이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경찰의 삼엄한 감시망이 풀리자 학교에는 총학이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총학연대조직인 '전학련'이 구성됐고, 삼민투는 그 전학련의 전위 투쟁조직이었습니다.

삼민투는 반미, 반외세 민족자주쟁취 투쟁과 파쇼헌법 철폐 투쟁을 이어나가면서 주로 기습점거농성을 통해 운동을 전개해나갔습니다. 대표적으로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들 수 있고, 그밖에도 광주 미문화원 점거, 노동부장관 비서실 점거, 민정당 중앙연수원 점거 등 점거농성을 이어나갔습니다. 당연히 정권에서는 이들에게 검거령을 내리고 보이는 족족 잡아들여 구속시켜버렸고, 구속자가 늘어나면서 조직기반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구속이 계속되고 삼민투에 의한 점거농성이 잠시 주춤해진 사이, 85년 연말로 접어들면서 NDR의 기치 아래 한데 모여 있던 운동권 사이에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바로 '반미'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인데요. 사실 이전까지의 학생운동에서 반미는 일반적인 수준의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국이 군부의 광주진압을 승인했다는 인식, 그리고 그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삼민투의 미 문화원 점거 농성도 '신군부의 광주진압을 승인한 미국 정부의 공식 해명과 사과, 그리고 5공 지원의 중단'을 요구하기 위해 한 것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NDR은 당시 대한민국의 모순을 '민족'보다는 '계급'으로 해석했고, 따라서 '미제'보다 '파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85년 말에 들어서면서 NDR 내부에서 '반미'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에 대한 의견 차이가 생겨났고, 이즈음 대학가에 배포 및 확산된 '해방서시'는 본격적 NL 노선의 태동에 불을 지폈습니다. 해방서시는 한국사회를 '미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 파쇼세력이 다스리는 신식민지 사회'로 규정하며 미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해방 운동을 우선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제기가 급속도로 확산되어 86년 초 NL은 '자민투'를 조직했고, 자신들의 이념과 노선을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로 규정했습니다. 이들은 반미자주화투쟁을 가장 앞줄에 놓고 전방입소 거부투쟁, 반전반핵 운동 등의 투쟁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이에 맞선 기존 NDR 주류세력은 '민민투'를 조직, 자민투의 반미투쟁에 대해 철 지난 종속이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며 반제반파쇼투쟁을 가장 앞줄에 놓고 파쇼헌법철폐, 민족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투쟁에 나섭니다.

이후 민민투의 주류세력은 제헌의회 소집투쟁에 나서면서 CA(제헌의회) 계열을 형성, 이후 학생운동은 NL과 CA의 대립구도로 이어집니다.

NL과 CA는 정세인식과 전략전술 면에서 차이를 드러냈는데,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식민지’냐 ‘신식민지’냐의 관점 차이였습니다. NL은 한국사회가 일제의 지배 아래 놓여있던 식민지 시절과 다를 바 없는, 미 제국주의의 지배 아래에 놓여있고 그로 인해 민족이 억압받고 있다고 판단, 미제의 식민통치를 타파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습니다. 

반대로 CA는 한국사회를 신식민지로 규정하면서 한국이 미 제국주의의 영향 아래 놓여있는 건 맞지만 직접지배가 아닌 간접지배를 받고 있으며 제국주의로부터 어느 정도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갖추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파시즘적 질서를 걷어내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았습니다.

방법론에서도 이 둘은 차이를 보였는데, NL은 당연하게도 ‘반미투쟁’을 최우선에 놓은 반면, CA는 당시 대중들로부터 ‘개헌’ 요구가 들끓고 있다는 점을 착안,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개헌이 아닌 ‘제헌’을 목표로 ‘제헌의회 소집투쟁’을 최우선으로 놓았습니다.

86년 한 해는 NL과 CA가 서로 ‘미제축출’과 ‘파쇼타도’를 부르짖으며 활발한 운동을 벌여나간 해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즈음, 운동권에는 한 가지 사상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네, 바로 그 유명한 ‘주체사상’이었습니다.

주체사상은 당시 서울대 학생이던 김영환이 청계천에서 구입한 단파 라디오로 북한방송을 듣고 85년 가을부터 몇 개의 문서(팸플릿)를 만들어 학내에 배포하면서 알려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강철서신(당시 김영환의 필명이 강철이었습니다)’입니다.

주체사상은 빠른 속도로 운동권에 퍼졌는데 이유는 크게 3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복잡하고 어려운 이론이 아닌 쉬우면서도 간결한 논리로 운동권을 사로잡았습니다. 한국사회의 모순은 민중과 미 제국주의 사이의 모순이며 따라서 미제를 축출하고 자주 통일을 이룩하면 한국사회의 모든 모순이 해결될 것이라는 간결한 논리. 둘째, 마르크스나 레닌, 마오쩌둥 같은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 아닌 토종 사상이라는 점(맑스로부터 영향을 받긴 했지만). 셋째, ‘품성론’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주체사상은 운동권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품성론이란 무엇이냐. 한마디로 ‘넌 어떤 인간이냐’하는 거였습니다. 당시 운동권 내부에서는 사상토론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각자의 이념과 사상을 가지고 치고 받았는데 그게 과열되다 보니 팸플릿으로 상대를 깎아내리며 비난하고, 관념적 이론으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식의 ‘싸움’이 빈번했습니다.

바로 그 때 품성론이 등장한 겁니다. ‘품성은 사상과 밀접히 관련돼 있으며 한 사람의 사상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품성론은, 지식과 이론이 아닌, 품성과 실천으로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싸움’에 지친 운동권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체사상은 당시 반미반제를 부르짖던 NL로 스며들어 그 안에서 일군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를 ‘주사파’라고 합니다.

다시 얘기로 돌아가서, 자민투와 민민투의 논쟁, NL과 CA 논쟁을 통해 대립하며 운동을 벌여온 두 세력은 ‘5.3 인천항쟁’과 ‘건대항쟁(애학투 결성식, NL)’을 통해 자신들을 세상에 드러냈지만 조직 이기주의와 지나친 좌경화로 인해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하고, 반대로 자신들의 부족한 역량을 여실히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87년 들어서면서 NL은 변화를 맞이하는데, 그동안 끊임없이 외쳐온 반미구호가 실상 대중에게 별로 먹혀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들은 초심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애초 70년대 후반 단계적 투쟁론에서부터 이어져온 조직적, 민중적 운동을 지향하여 기반을 다지는 것과 동시에 대중의 요구사항이 무엇인가를 알려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시 국민들이 염원하던 ‘개헌’에 포인트를 맞추기 시작합니다.

반면 CA는 끊임없이 시위와 가투, 제헌의회 소집을 위한 투쟁에 나섭니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들의 구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CA 노선은 위축, 이후 87년 항쟁에서 투쟁의 주도권을 NL에 완전히 넘겨주게 됩니다.

87년은 아시다시피 굉장한 의미가 있는 해입니다. 바로 ‘6월 항쟁’과 ‘6.29 선언’이 있었기 때문이죠. 87년 초 서울대 박종철군이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자 민심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정권이 공권력을 동원해 막았지만 추모대회, 규탄투쟁 등이 연달아 이어졌고,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 노동계, 종교계, 일반시민까지 거리로 나서게 됩니다. 

당시 민의는 ‘개헌’을 통한 ‘대통령 직선제’를 원하고 있었는데요. 결국 보다 못한 전두환이 나서서 일체의 개헌논의를 중단하라는 ‘호헌조치’를 발표하지만 이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됐습니다. 전국이 다시금 ‘호헌철폐’를 주장하며 달아올랐던 것이죠.

이 무렵 연세대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전국은 완전한 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갔는데, 무려 5백만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시위에 나섰습니다. 결국 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6.29 선언을 내놓게 됩니다.

87년은 운동권에도 굉장한 의미가 있는 해였습니다. 그 전까지 자기들끼리의 울타리 안에서만 논쟁하고 주장하던 이념과 사상을 대중과 군중 앞에 드러내고 시험받고 검증받는 자리가 마련된 셈이었으니까요.

당연한 얘기지만 승자는 NL이었습니다. NL은 여전히 반미반제를 주장했지만 이전보다 확고한 대중노선을 타고 당시 국민들이 염원하던 개헌에 포인트를 맞춰나갔습니다. 반면 CA는 개헌과 직선제 요구를 개량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여전히 제헌의회 소집을 위한 투쟁 일변도로 나갔죠. 게다가 그 이전부터 학생회를 통한 조직을 갖추었던 NL이었던 만큼, 막강한 조직력을 통해 대중 영향력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결국 CA 진영은 자기 노선을 반성하면서 87년을 끝으로 대부분 소멸, 전환되었습니다.



ㅇㅇ
한총련과 민노당까지 다 쓴 뒤에 올리려고 하였으나, 분량의 압박으로 일단... ㅎ

87년까지의 과정만 올립니다. 분명 시작할 땐 최대한 간단하게 쓰겠다고 한 것 같은데...

너무 길어졌네요. 그나마 앞부분을 좀 떼어먹고 써서 이 정도 분량이 된... -_-;;

혹 88년부터는 '내가 쓰겠다'고 자처하는 분이 계시다면 감사하겠습니다. ㅎ
(막상 쓰고 보니 꽤나 힘든 일이라서... ㅠㅠ)

참고문헌은 꽤 많아 다 명기하긴 어려울 것 같네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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