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 [멋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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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드높아 가니 벌써 가을인가 보다. 가을이 무엇인지 내 모르되 잎이 진 지 오래고 뜰 앞에 두어 송이 황국(黃菊)이 웃는지라 찾아오는 이마다 가을이라 이르니 나도 가을이라 믿을 수밖에 없다. 촛불을 끄고 창 앞에 턱을 괴었으나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다시 왜 사는가. 문득 한 줄기 바람에 마른 잎이 날아간다. 유위전변(有爲轉變)―바로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이 사나 보다.
우주의 원리 유일의 실재에다 ‘멋’이란 이름을 붙여 놓고 엊저녁 마시다 남은 머루술을 들이키고 나니 새삼스레 고개 끄덕여지는 밤이다. 산골 물소리가 어떻게 높아 가는지 열어젖힌 창문에서는 달빛이 쏟아져 들고, 달빛 아래는 산란한 책과 술병과 방우자(放牛子)가 네 활개를 펴고 잠들어 있는 것이다.
멋’, 그것을 가져다 어떤 이는 ‘도(道)’라 하고 ‘일물(一物)’이라 하고 ‘일심(一心)’이라 하고 대중이 없는데, 하여간 도고 일물이고 일심이고 간에 오늘밤엔 ‘멋’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멋이 있었다. 멋을 멋있게 하는 것이 바로 무상(無常)인가 하면 무상을 무상하게 하는 것이 또한 ‘멋’이다. 변함이 없는 세상이라면 무슨 멋이 있겠는가. 이 커다란 멋을 세상 사람은 번뇌(煩惱)라 이르더라. 가장 큰 괴로움이라 하더라.
우주를 자적(自適)하면 우주는 멋이었다. 우주에 회의(懷疑)하면 우주는 슬픈 속(俗)이었다. 나와 우주 사이에 주종의 관계 있어 이를 향락하고 향락 당하겠는가. 우주를 내가 향락하는가 하면 우주가 나를 향락하는 것이다. 나의 멋이 한 곳에서 슬픔이 되고 속(俗)이 되고 하는가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즐거움이 되고 아(雅)가 되는구나. 죽지 못해 살 바에는 없는 재미도 짐짓 있다 하랴.
한 바리 밥과 산나물로 족히 목숨을 이으고 일상(一床)의 서(書)가 있으니 이로써 살아 있는 복이 족하지 않은가. 시를 읊을 동쪽 두던이 있고 발을 씻을 맑은 물이 있으니 어지러운 세상에 허물할 이가 누군가. 어째 세상이 괴롭다 하느뇨. 이는 구태여 복을 찾으려 함이니, 슬프다, 복을 찾는 사람이여. 행복이란 찾을수록 멀어 가는 것이 아닌가.
자기 처지에 만족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 다만 알려고 함으로써 멋을 삼노라.
...이게 제대로 된 문학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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