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은허접해도꿈만은 [36208] · MS 2003 · 쪽지

2007-03-03 18: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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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은 허접해도 꿈만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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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시작하면서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서울대학교 교육학․국민윤리교육과군에 입학하게 된 학생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05수능, 06수능, 그리고 7차의 마지막 시험인 07수능까지,,, 이 모든 것을 경험해 본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는 삼수의 과정을 거쳐 본 학생입니다.

저는 고3때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나서 공부를 시작하여서 반수와 삼수를 독학으로 하면서 인생에 대해서 참 많은 것을 느꼈고 그와 더불어 \'수능\'이라는 놈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수기를 통해서 제가 삼수까지 하면서 겪은 모든 경험과 수능에 관한 모든 것들을 말해보고자 합니다,,,특히 이 글을 읽고 나서 \'PMP를 사거나 인강을 많이 듣고 또는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하는 학생들\'과 \'독학을 두려워하고 있는 수험생들\' 그리고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공부에 매진하는 극소수(!)의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노력하면 다 된다\'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는 가난과 역경을 기본으로 우정과 사랑으로 양념을 한 그런 드라마 같은 얘기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역경은 있겠지만,,,) 그런 걸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려면 드라마를 보시던지 드라마 대본사이트에 가서 찾아서 읽어 보시든지 하기 바랍니다. (냐홍홍사건처럼 낚시에 낚이시면 책임 못 집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패자와 더불어 승자도 역사를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죠. 승자가 역사를 왜곡하면 승자라서 믿게 되고 패자가 역사를 왜곡하면 너무나 리얼해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수험생활을 하면서 느끼고 보고 배운,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만 할까 합니다. \'아니 지금 노력하면 다 되는 게 아니라고? 김빠지는 소리 하고 있네!\'하고 화를 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애당초 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괜히 읽었네. 시간 아깝게 젠장 ㅡㅡ;;\' 이라는 생각보다는 \'잘 읽었다. 뭔가 느꼈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에 오르비에서 2년에 걸친 대형 낚시 사건 이른바 \'냐홍홍 낚시수기 사건\'이 있었습니다. 인증이 없으면 수기에 쓴 내용들이 정말 사실인지도 의문이 들고 (예: 오르비 점수 기록동의 엄청난 낚시들) 좋은 대학은 합격했으되 거짓으로 자신이 밟아온 과정을 왜곡, 과장해서 쓰는 경우에도 사실여부를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승자는 역사를 왜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글을 쓰면서 적절한 인증과 더불어 수험생으로서 제가 겪었던 모든 감정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도록 할까 합니다.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에게 행복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Ⅰ. 중학교 시절

■ 그저그런 중학교 1학년 시절

중학교 시절은 지금 생각해도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시절이다. 중학교 1학년때까지 나는 그저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 공부도 대충, 노는 것도 대충하는 그런 학생,,, 항상 방과 후면 집에 와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또 밤에는 TV를 보고 그렇게 지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밤 10시에는 드라마, 11시부터 12시까지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방송됐다. TV 프로그램 중에서 아직도 기억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울랄라 울랄라~\"하면서 이다도시 성대모사를 하는 심현섭과 \"안녕하세요~ 소라에요~\"라는 인사말로 시작하는 이소라 성대모사로 인기를 끌었던 이장숙 등이 나와서 사회자 서세원과 여자MC (장진영으로 기억함)와 더불어 시사풍자토크를 하였으며 또 \'패러디타임\'이라는 코너를 통해서는 영화포스터를 패러디하여서 정치현실을 풍자하기도 하였다.

TV와 더불어서 초등학교 6학년 때 사게 된 셀레론 300 컴퓨터는 나의 일상생활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전에 486으로 삼국지 5를 하고 삼국지 6를 샀음에도 윈도우 98이 없어서 동생의 친구 집에 가서 했던 내가 드디어 내 컴퓨터로 모든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KOEI 매니아였던 나는 새로 산 컴퓨터로 그 당시 최고의 게임이라 꼽혔던 대항해시대4를 플레이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예약판매로 산 대항해시대4는 아름다운 음악과 환상적인 그래픽, 그리고 완벽한 스토리로 인해서 나를 게임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역시 KOEI! 라는 탄성이 저절로 나오게 만드는 게임이었다. 그리고 이미 초등학교 6학년 때 끝낸 삼국지 조조전이 \'마왕각성 모드 (2가지 선택이 나올 때 계속 역사적 사실과 반대의 사실을 선택하면 위에 하트표시 게이지가 0이 되어서 제갈량이 마왕이 되어서 진행되는 조조전의 숨겨진 모드)\'를 코에이 소식지를 통해서 접하면서 마왕각성 모드를 깨기 위해서 조조전을 한창 플레이 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ㅋㅋ


▲삼국지와 대항해시대 매니아였던 내가 모은 시리즈들
  삼국지 8 예약판 구매자 5천명 중에서 평생 무료로 삼국지를 받는 이벤트에
  뽑힌 3명 중에 1명으로 당첨되어서 그 이후로 삼국지 시리즈는 무료로 받고 있다.-_-v


■ 한국 최초의 배틀넷 게임
    ->여기서부터의 게임얘기는 안 읽으셔도 됩니다.

중학교 1학년이 시나브로 지나가고,,,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던 겨울방학,,,2000년 1월 4일,,, KOEI게임만을 즐겼던 나의 인생을 앞으로 4년 동안 피폐하게 만들 전략시뮬레이션 게임들 중 첫 번째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PC파워진이라는 게임잡지를 통해서 알게 된 당시 스타의 야성을 뛰어 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UP2DATE라는 회사가 만든 를 구입하게 된 것이었다. 내가 제일 처음 접한 우리나라 전략시뮬레이션인 트리거소프트에서 만든 1996년도 발매작 에 이은 나의 두 번째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초등학교 때 10번 가까이 하고 또 하고 해서 12개의 시나리오를 깨고 또 깨고 하였다. 당시 우리 집에는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팩스를 설치하는 것을 계기로 한국통신(현 KT) 아저씨의 홍보에 넘어가서 ISDN(기억나시는 분 손??ㅋ)이라는 인터넷을 설치한 상태였다. 그리고 연이어 사게 된 삼국통일,,,(이하 삼통) 삼통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던 스타를 따라잡기 위해서 배틀넷과 흡사한 E2넷이라는 서버를 운영하였고 나는 삼통을 처음 산 몇 안되는 유저로서 E2넷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런 저런 아이디를 만들고 게임을 하다가 다른 사람들의 한 개의 아이디만을 가지고 계속 활동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한 개의 아이디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그 때 내가 만든 아이디가 [허준]허준이었는데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국민드라마 \'허준\'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이었다,,,ㅋㅋ 이 아이디를 쓰기 전에 피카츄를 너무 좋아해서 만든 [피카츄]길드는 나의 운영 소홀로 인해서 흐지부지되어서 솔로로 활동하게 된 것이었다.

게임을 하면서 이기면 기분이 좋고 지면 오기가 생겨서 몇 판이고 고수에게 도전을 하였다. 고수에게 계속 져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수랑 붙으면 고수의 필살전략에 대한 해법을 연구하고 또 적용해서 실전에 임함으로서 나의 실력이 늘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할 때 자기의 현 수준보다 조금 어려운 것을 공부해야 실력이 느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인 것이다. 개학을 하고 2학년이 되었을 때도 삼통에 대한 열의는 전혀 식지 않았다. 4시에 집에 오면 계속 게임밖에 하지 않았다.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에의 중독을 이 때 맛보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스타로 끝나는 게임중독의 전초전에 불과한 것임을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으니,,,

이렇게 삼통에 푹 빠지게 된 내가 삼통에 실증을 느끼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제작사인 업투데이트에서 패치를 통해 게임의 패턴을 단조롭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새로운 패치가 나오고 나자마자 ‘선기병 떼거리 러쉬’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선기병은 백제에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유닛인데 사거리도 길뿐더러 공격력도 강하고 값도 쌀뿐더러 스타의 벌쳐처럼 빌드타임도 짧아서 단시간에 많이 모일 수 밖에 없는 최강의 유닛이었다. 그 당시 나의 주종은 신라였는데 ‘선기병 떼거리 러쉬’에 맨날 당하다가 해법을 연구한 결과 신라에서 체력이 가장 막강하고 근거리 유닛인 시위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체력에서 선기병보다 우위에 있는 시위를 이용함과 동시에 시위에 특수 기술인 ‘분신술’을 이용하여 백제를 공략하는 방법이었다. 마치 스타에서 프로토스의 유닛인 아비터가 할루시네이션을 쓰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스타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아비터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시위러쉬로 선기병에 대한 파해법을 개발한 나는 이 전략을 삼통에 유행시키게 되었다. 전적도 꽤 되었는데 정확히 몇 승 몇 패 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학교에서 강제로 쓰라고 시킨 일기 덕에 지금 이런 글을 쓸 수 있는데 삼통할 때의 전적얘기는 나와있지 않다 ㅋ 시위로 승승장구를 하고 있었건만 게임패턴이 항상 단조로웠다. 항상 1개의 유닛만 떼거리로 만들어 쓰는 전략이 통했다. 스타처럼 골고루 섞어서 쓰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 전략의 단조로움에 염증을 느꼈다. 계속 같은 것만 반복하니 재미가 없었다. 제작사에 나름대로 3국간의 밸런스에 대해서 연구를 하여 글을 올렸지만 도무지 들어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술적으로나 근성으로나 외국의 게임회사를 따라가기에는 매우 역부족인 우리 나라 게임회사의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게임의 단조로움으로 인해서 흥미를 잃고 삼통을 떠나게 되었고 또 다른 게임인 임진록과 스타에 빠지게 되었다.

■ 스타의 부흥과 임진록2의 등장

내가 중2가 되었던 2000년도에는 스타가 대세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최초로 우리 아파트 밑에 허름한 586 컴퓨터들로 가득한 그 당시 소위 말하던 \'PC방‘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학교에 가면 항상 얘들의 관심은 어제 한 스타얘기로 가득차 있었다. 당시 삼통을 하고 무슨 게임을 할까 찾던 나는 대세에 휩쓸려서 스타를 시작하게 되었다. 정품이 없어서 무료서버인 충남대 서버와 CYBER GAME 서버를 왔다갔다하면서 이용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친구들과 평일에 수업이 끝나면 PC방에서 가서 헌터와 로템에서 팀플을 즐기거나 개인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스타에 대한 관심은 게임을 직접 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 당시 최초로 투니버스에서 중계를 하는 ‘하나로 통신배 스타리그’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일기에 내용을 보면 스타리그 중계가 드라마 ‘허준’의 시작시간과 똑같은 10시부터 하는 바람에 그 당시 국민드라마였던 ‘허준’과 둘 중에서 무엇을 볼까 고민하다가 결국 스타리그를 비디오 녹화해서 본 것으로 나와 있다. ㅡㅡ; 지금 보면 참 웃기다 ㅋㅋㅋ(옛날에 쓴 일기 나중에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지금 온게임넷 스타리그의 시초이기도 한 그 리그에서는 지금의 해설트리오인 김캐리 김도형씨와 MC용준 전용준씨 그리고 食神 엄재경씨 중에서 전용준씨 대신에 정일훈 캐스터가 다른 두 분과 같이 해설을 같이 하였다. 스타리그를 빠지지 않고 녹화해 보면서 결국 모든 경기를 다 보게 되었다.

당시 생각나는 선수가 있다면 엽기의 달인 김대기, 쌈장으로 유명한 이기석, 메카닉 테란의 시초 김대건, 우주방어 테란 유병준, 하드코어 질럿러쉬의 대가 김태목, 그리고 공격형저그의 아버지 변성철, 저그대마왕 강도경, 농사꾼질럿 김동수(현재 KTF로 복귀), 살아있는 히드라 국기봉, 스켈톤 봉준구 선수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당시 이 선수들의 환상적인 경기들을 보고 또 배우면서 스타를 더욱더 열심히 하게 된 것 같았다,,, 스타가 2007년 현재 관련종사자 20여만명을 낳고 축구와 야구같은 하나의 스포츠,,, 즉 E-Sports가 될 줄은 누가 상상했으랴,,,

스타를 꾸준히 하면서 나는 스타로 그치지 않고 다른 게임까지 하게 되었다. 국산게임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 나에게 찾아온 하나의 게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임진록2 였다. 삼국통일을 하면서 게시판에 임진록2와 삼통을 비교하는 글이 여러 있게 되었는데 그 글을 통해서 임진록2를 접하게 되었다. 데모로 접한 임진록2는 너무나 재미있었고 삼통을 접은 후 스타만을 하던 나는 마침 다른 반 친구가 삼성컴퓨터를 샀을 때 받은 공짜 임진록2를 5천원에 구입하게 된다. 임진록2는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 중 하나를 골라서 스타처럼 하는 전략시뮬레이션이다.

이 게임이 바로 내가 두 번째로 하게 된 전략게임이었다. 임진록2는 작은 유닛들을 단체로 부리는 데 있어서 뭔가 새로운 맛이 있었다. 거기다가 내가 좋아했던 우리나라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서 더욱더 나에게 잘 맞은 느낌이었다. 초창기에는 별로 하는 사람이 없어서 하는 사람들만 했지만,,, 제작사인 HQ팀에서 이에 좌절하지 않고 머리를 쓰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허준’의 영향을 받아 인기를 끌기 위해서 조선에 영웅캐릭터인 ‘허준’을 등장시킨 것이었다. ㅋㅋ 당시 조선에는 이순신, 유성룡, 곽재우, 사명대사가 있었는데 여기에 허준을 등장시킴으로써 약세였던 조선의 밸런스도 맞출 뿐만 아니라 게임의 홍보효과까지 챙기는 2가지 효과를 같이 누리게 되었다.

인터넷을 타고 또 신문 등 매체를 통해서 게임에 인기 드라마 ‘허준’의 캐릭터가 영웅캐릭터로 들어간 게임이 있다는 식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임진록2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스타와 임진록2를 번걸아했던 나는 임진록2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게임의 중심을 스타에서 임진록2로 옮기게 되었다. 스타보다는 임진록2가 더 재미있었다. 막 개편된 순위시스템은 게임유저들의 치열한 순위 쟁탈전을 유도하기에 충분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밥만 먹고 동생이 컴퓨터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붙잡고 게임만 했다. 주말에는 학교를 안 가기 때문에 거의 풀로 게임을 했다. 지금의 내가 생각해 볼 때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게임에 나의 영혼을 팔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 임진록2의 한 장면 : 화면 중간 아래에 사명대사와 유성룡이 보인다.

임진록2에서의 순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학교에서의 나의 성적은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1학년 때는 시험기간에는 공부라도해서 어느 정도 성적을 거두었지만 2학년 들어서는 시험기간에 시험공부보다는 임진록2를 하는 것에 더 몰두했다. 그래서 성적이 말 그대로 개판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 당시 나에게는 그런 것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다른 사람들과 게임을 해서 이기고 또 새로운 고수를 만나서 치열하게 한 판 게임을 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얻었는듯 싶다,,, 게임을 하고 하고 또 하였다,,, 밥만 먹고 임진록2만 하였고,,, 나름대로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나의 아이디는 ‘징기스칸’,,, 그 옛날 징기스칸이 광활한 유라시아를 정복했던 것처럼 나도 임진록2를 정복해보자 하는 마음에서 든 아이디였다. 혹시 이 글을 보는 분들 중에서도 임진록2를 한 때 하셨던 분이 있더라면 아실지도 모르겠다,,,-0-ㅋ

꾸준히 하다가 보니 전적은 쌓이고 쌓여서 2700승 300패 정도까지 되었다,,, 정말 그 때는 미친듯이 게임만 했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이 스타얘기만 하기 때문에 스타에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임진록2는 스타보다 더 많이 했다,,, 래더순위 1위가 되었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임진록2에서 래더 1위가 채널에 나타나면 채팅창에 표시가 날뿐만 아니라 빵빠레 소리까지 났었다. 빵빠레 소리에 그 채널은 다른 유저들의 환호성글로 도배가 되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임진록2에 그렇게 미쳤었던 것은 웃기고 부질없는 짓이었음에도 내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게임에서 남들이 나를 고수로 인정해 준다는 것이 상당히 기분이 좋았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0-ㅋ 내가 내 아이디로 따로 채널을 만들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한겜을 신청했고 나는 나의 원칙은 ‘게임은 항상 중수이상과’를 지키면서 중수이상의 고수분들과만 게임을 했다. 그래야지만 게임이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2000승을 넘어갔을 때부터는 내 생각이지만 거의 임진록2에 있어서는 ㅚ수급에 도달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항상 고수분들과의 도전을 즐겼고 거기에서 이기든 지든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곤 했다. 실력이 늘어서 임진록2 대회까지 출전하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만류로 오프라인 대회는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 온라인에서 열린 대회만 2번 참가를 했었는데 임진록2를 시작했던 초창기에서는 8강에서 떨어졌고 내가 1위가 되고 나서 참가한 고수들만의 토너먼트에서는 내가 1위를 했었다. 그 당시 상대는 명나라였고 나는 주종 일본이었는데 상대방 고수가 마지막에 섬에다가 망루로 무한도배(명나라 망루는 그 당시 너무나 강력하여 도배하면 감히 뚫을 수가 없을 정도로 게임의 밸런스를 해쳤다.)를 하고 최후까지 버텼는데 나는 근성을 가지고 맵에 있는 자원을 다 먹으면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섬맵의 망루를 다 깨고 마지막 승리를 따내었다. 그 때 경기시간이 아마 2시간 정도였던걸로 기억한다.

임진록2를 즐기면서 겪은,,,아직도 잊지 못할 2가지 에피소드가 남아있다. 하나는 그 당시 프리챌배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 봉준구 선수를 꺾고 우승하여 ‘가림토스’로 유명한 김동수 선수가 삼성전자에서 주최한 프로게이머 임진록2 초청전에 나가기 위해서 온라인에서 연습을 하고 있다가 나를 만나서 같이 게임을 한 것이었다. 김동수 선수는 프로토스의 전략가답게 나와 같은 일본으로 선택하여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패스트 총병러시를 하였다. 김동수 선수는 나와 몇 판의 게임을 끝낸 후 나에게 아시아 서버에서 스타를 한 판 하자고 제안했으나 그 당시에 내가 스타정품이 없고 충남대 서버나 사이버게임 서버같이 프리서버만 접속이 가능한지라 김동수 선수랑 게임을 하지 못하였다. -0-ㅋ 그 때 정말 같이 스타도 하고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김동수 선수에게 충남대 서버로 오도록 부탁했으면 되었을텐데 -_-; 그 생각을 당시에 못 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에피소드는 바로 김캐리로 유명한 온게임넷 스타리그 김도형 (현재 김태형으로 개명함) 해설위원이다. 김도형 해설위원이 임진록2 대회 해설을 맡게 되었는데 게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었나보다. 그래서 김도형 해설위원의 그 당시 여자친구 (이혼한 부인인지는 모르겠음)가 임진록2에 접속하여 나에게 귓말을 보내와서 김도형 해설위원이 프로게이머 임진록2 초청전을 해설하게 되었는데 게임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여서 그 날 밤을 새서 임진록2와 관련한 전략이나 그런 것들을 정리하여 한글97로 작성하여 보내느라 고생했었다,,,

■ 중학교 3학년 2학기,,, 강제로 학원에 끌려가다

나의 폐인생활을 그칠 줄을 몰랐다,,, 부모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셔도 내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는듯 싶다, 2학년 때 학교에서는 깨어있는 시간보다 자는 시간이 더 많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후회가 되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감정을 못 느꼈다. 한마디로 철이 없었다,,, 성적은 곤두박질쳐서 막장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완전히 공부에 손을 놓은 얘들이 밑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는지라 그래도 학교에서 중간은 간 거 같았다. 3학년이 되어서도 나의 게임중독은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를 갔다오면 항상 게임으로 하루를 보냈다. 잠도 매일 새벽 2시쯤에 자고 학교에 가면 다시 졸기만 하고,,, 임진록2의 확장팩 : 조선의 반격이 나온 이후로도 열심히 했다.

그러나 내가 임진록2 : 조선의 반격을 그만두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바로 패치로 인해서 게임이 요구하는 사양이 높아져 버린 것이다. 당시 우리 컴퓨터는 셀레론 300 cpu를 탑재하고 있었는데 이제 이것으로는 조선의 반격을 굴리기가 어렵게 되었다. 게임을 하는데 자꾸만 버벅되고 끊겨서 인터넷 문제인가 생각했더니 스타가 잘 되는 걸로 봐서 그것은 아니었다. 알고 보니 패치를 해서 게임의 그래픽이 향상되어서 컴퓨터의 요구사양이 올라간 것이었다. 그러나 눈으로 보기에 그래픽이 달라진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ㅡㅡ 나는 저사양 유저들을 위해서 다시 수정해달라고 했지만 제작사는 나를 비롯한 저사양 유저들의 건의를 무시했다,,, 결국 이것을 계기로 나는 임진록2를 접게 되었다,,, 그럼 이제 공부를 하면 될 것을,,,ㅡㅡ 다시 그 동안 소홀했던 스타로 눈을 돌렸다, 그래서 학교에서 체육시간에는 운동도 안하고 벤치에 앉아서 어제 했던 게임들에 대해서 친구들과 토론을 하고 수업시간에는 졸거나 자고 그렇게 보냈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담당과목인 영어시간에 들어오실 때 마다 졸고 있는 나를 보고 “이 PC(컴퓨터라 안 부르시고 독특하게 PC라고 그러셨다), 어제도 게임했지!!”하면서 다그치셨다. 그래서 중3 때 나의 별명이 ‘PC형’으로 지어졌다. 뒤에 형은 우리가 “김 형, 이 형, 박 형” 이렇게 부를 때 붙이는 그 형과 같은 의미이다. ㅡㅡ;

그렇게 또 찌질하게 시간을 보내고 3학년 여름방학의 어느날,,, 드디어 참다 못한 어머니께서 나를 강제로 학원에 끌고 가셨다. 나는 가기 싫다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발악을 했지만 어머니의 완력을 이겨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수구리고 학원의 문턱을 넘을 수 밖에 없었다. 나랑 어머니와 원장님은 한테이블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다. 원장님과 어머니가 많은 대화를 나누셨는데 어머니는 “얘가 게임에 빠져서 기초부터 놓친지라 처음부터 차근차근 가르쳐달라”고 하셨고 나는 원장님의 기초반 입문 권유에 응하였다.

학원을 다니는 것이 너무나 싫었지만 강제로 여기까지 온 이상 등록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학원을 다니면서 학원을 다니는 시간만큼 내가 하루에 게임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어짜피 다니는 학원이니까 열심히 하자는 생각으로 학원에 있을 때는 모르는 내용이든지 아는 내용이든지 열심히 본 것 같았다, 다만 수학은 너무나 기초가 없었기 때문에 들어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고 전혀 발전이 없었다,,, 그냥 멍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영어 같은 경우에는 그나마 미리 아는 것도 좀 있어서 흥미롭게 배웠다.

내가 영어를 그나마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X선생 영어교실 때문인 듯 하다. X선생 영어교실은 매일 아침 전화를 통해서 어제 공부한 사항을 확인하는데 지문 읽는 것은 그래도 할 수 있었지만 빈 칸 채우기는 매일매일 공부를 하지 않은 관계로 답안지를 보고 대답하고 그랬다 -_-;; 신문을 자주 보면서 X선생 영어교실 광고를 볼 때마다 거기에는 X선생 영어교실을 열심히 해서 토익 만점을 받은 중3 학생도 있고,,, 그런 걸 볼 때마다 \'나는 저때 왜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마구 든다,,, (물론 내가 했다고 해서 그 학생처럼 토익 만점을 받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람은 모두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단지 그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나 후회가 될 뿐이다,,,)

언어라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한다고 한다. 노암 촘스키라는 언어학자가 언어는 5~6살 때인가 익힐 때 가장 효율적이라고 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정말 맞는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나라의 전체적인 영어교육열이 높아지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6차에 비해서 7차 수능 영어가 훨씬 어려워졌지만 커트라인을 보면 난이도의 차이가 없는 느낌이 드는 것은 영어가 어려워진 만큼 영어를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전체적인 수준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영어라는 과목에 대해서 나중에 언급을 다시 하겠지만 초중학교에서 하지 않으면 정말 힘든 과목인데 간혹 완전 바닥에서 단기간에 영어점수가 오르는 학생들이 있다. 영어에 관한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어쨌든 그렇게 3학년 2학기는 학원을 다니면서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강제로 시키는 일이었고 또 나 스스로가 공부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공부라는 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 할 때\' 잘 할 수 있다라는 사실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 깨닫게 되었지만,,, 2학기에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있었는데 내가 시험기간에도 친구들과 스타를 하는 바람에 그 모습을 보신 아버지께서 새벽에 내 방에 오셔 모니터를 주먹으로 내리 치셨다. 그 때는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죄송스럽다,,,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그러셨을지,,, 하지만 나는 게임에 미쳐있었기에,,, 나 자신을 제어하지 못했다,,,

결국 15인치 삼성모니터가 고장이 났다,,, 그래서 이제 게임을 못 할 줄 알았건만,,, 마침 그 때 아버지가 나로 하여금 문서를 치는 일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컴퓨터 사용이 불가피한 상태였다,,,-0- 결국 모니터를 17인치 평면으로 바꾸게 되었다,,,-0-;; 17인치 평면모니터로 게임을 하니까 유닛하나하나가 눈에 더 잘 들어오고 눈도 덜 피로한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가 내가 게임을 못 하게 하실려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환경(?)에서 게임을 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았으니,,,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0- 나는 그렇게 3학년 2학기도 게임과 함께 하면서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 고등학교 1학년으로서의 시작

내가 다니던 중학교가 사립인지라 같은 재단인 고등학교가 중학교 반대편에 있었다. 나의 중학교 내신 성적이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지라 점수를 모르겠는데 당시 내가 가는 고등학교는 웬만하면 들어갈 수 있는 그런 학교였다. 그건 우리 지역 전체 학력이 낮기도 한 덕분이었다,,, (정말 인생포기한 얘들 많음)

고등학교를 올라가는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이 기간에 고등학교에서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보충수업을 진행하였다.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되는 것이라서 참석을 하였고 수업을 들었는데 공부에 흥미가 없던 내가 당연히 수업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같은 중학교에서 올라온 얘들과 수업시간에 얘기를 하거나 아니면 게임하느라 피곤해진 육신을 위해 잠을 자거나 했다. 그 결과 2번의 반편성 배치고사를 쳤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수학이 둘다 50점을 못 넘겼다는 것,,, 나는 정석이라는 것을 중학교 3학년 2학기에 우리 반에서 제일 공부를 잘했던 친구가 미리 선행학습을 하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는데 그냥 그런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만 했을 뿐 그 책으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한 거 같다,,,배치고사수학의 범위는 고등학교 수학 10-가 의 앞부분이었는데 당시 다니고 있던 학원에서 수학 10-가를 배웠건만 공부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에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고 그 결과 점수가 제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하면서 겨울방학을 보냈고,,, 드디어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게 되어서 모의고사라는 것을 보게 된다. 처음 치는 모의고사 때 분위기를 정확히 기억할 수 는 없지만 굉장히 진지하게 열심히 치룬 것으로 얼핏 기억한다. 공부는 제대로 안 해도 막상 그런 시험에 임하면 열심히 하는 스타일,,,ㅡㅡ; (아마 주변에 많을 것이다.)


▲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해서 처음 치룬 3월 모의고사 성적
   지금 보면 부끄럽다,,,-0- 언수외가 올 3등급에 사탐 과탐이 4등급, 5등급,,,
   여기서 나온 과탐이 2학년 성적의 전주곡임을 이 때는 알지 못했다,,,
   400만점에 280점이니까 500점으로 환산하면 350점이다. 상당히 못한 것임에도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는 전국의 고마운(? )학생들이 있어서
   원점수에 비해 백분위과 등급이 후하게 나온 것 같다.

그냥 그저 무덤덤했다. 성적표를 받았을 때는 신기한 느낌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1 이 때의 자세한 내용을 좀더 적고 싶지만 중학교 2학년 2학기부터 고2 1학기까지 일기 적는 습관을 버려 버린지라 아쉽다,,,ㅠㅠ

학교에서는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모르겠다. -0-; 그 당시 우리 반에 약간 싸이코틱하면서 선생님과 농담 따먹기를 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 때문에 우리 반 분위기가 참으로 묘했다. 어떨 때는 너무 재미있었고 어떨 때는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분위기를 만들어 가서 좀 그랬다,,, (아마 반마다 이런 캐릭터가 꼭 있을 것이다.) 그런 걸 무시하고 그냥 그 시간에 공부를 하면 되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 친구들의 그런 행동에 재미가 들렸는 모양이었다, 그 친구들이 수업할 때마다 시작(?)을 하면 그걸 보고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엄한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반이 조용해지면 나는 잠을 자곤 했다. 고1 때도 저녁에 잠깐 학원을 가고 그 이외의 시간에는 스타를 했고 늦게 잤기 때문에 나는 선생님들과 친구들로부터 \'잠충\'으로 불려졌다.

\'잠\'과 더불어 내가 알려지게 된 것은 비염 때문이었다. 비염은 아버지 쪽 체질을 유전을 받아서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걸렸었는데,,, 심한 정도는 일단 고3 때 수능이 끝나고 1차적으로 좋아졌고 2차적으로는 반수, 삼수 때 잠을 많이 자고 매일 도서관을 왔다갔다 하며자전거를 타면서, 3차적으로는 삼수할 때 내가 한의사 선생님이 지어준 약이 계속 효과가 없자 인터넷으로 찾은 보중익기탕 처방대로 약을 지어달라고 하여 그 약을 먹으면서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3차에 먹은 약은 몸속이 뜨거워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밤에 자다가 자꾸만 깨는 그런 희한한 부작용을 초래하여 결국 조금 먹다가 중단하고 지금은 심할 때마다 약국에 파는 한약재로 만든 생약을 먹고는 한다. 그럼 잠시나마 호전이 된다. 삼수 때 다닌 한의원 이전에 다닌 한의원만 해도 5군데가 넘었지만 단 한명의 한의사도 나의 병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자가 없고 환자를 돈으로 밖에 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허준같은 心醫(심의 : 환자의 마음을 헤아려 끝까지 병을 치료해주는 의사)가 세상에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회의를 품고 있다.

아직도 내 체력이 허약한 것은 비염으로 인해서 폐가 안 좋은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약을 먹고 치료를 하려고 해도 몸은 고쳐지지 않았다. 고1 여름방학 때 인근의 종합병원에 경희대 이비인후과 교수님이 특진을 온다고 하셔서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진단을 받고 비중격만곡증 교정수술(코뼈가 휘어 비염에 생겼다고 판단하여 코뼈를 바로 잡는 수술)을 받았건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내가 비염에 대한 나름 지식이 생겨서 결론을 내린 것이지만 내 병은 아버지 쪽 체질을 유전을 받아 생긴 \'체질병\'이지 코뼈가 휘어서 생긴 \'구조병\'은 아니었다,,,

비염으로 인해서 나는 하루에 두루마리 휴지 1개를 항상 들고 다녔는데 얘들이 휴지가 없으면 항상 나한테 와서 빌려가고는 했다. 안 빌려주자니 쪼잔할 꺼 같고,,, 빌려주자니 많은 친구들한테 빌려줘야 하니까 금새 동이 나고,,,ㅡㅡ; 지금 기억하기로 얘들이 정말 많이 빌려갔다,,, 나도 코 푸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빌려주느라 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때 같은 반이 되어서 3년 내내 점심을 같이 먹은 친구가 휴지를 빌리면서 너무 미안해하면서 \"졸업하면 선물로 두루마리 휴지 한 박스 사줄게.\"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것도 기억이 난다,,,ㅋㅋ ㅡㅡ;

고1 2학기가 시작되어서 내가 다니던 학원에서 우리 고등부가 문을 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학생 수가 너무 적어서 더 이상 이 반을 운영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 지역은 학교들이 모두 기숙사를 갖추고 있는지라 대부분 기숙사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였다. 어영부영하게 학원을 다니던 나는 학원을 그만두게 된 것에 쾌재를 불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미친X이었지만,,,ㅡㅡ 그 때는 그랬다,,, 말 그대로 미쳤으니까,,,


학원을 그만두고는 한 동안 저녁에 집에 오면 컴퓨터 밖에 하지 않았다. 학원을 안 가고 게임을 하는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임에 더 열을 올리기에 충분한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2학기가 시작된지 얼마 안되어서 선생님이 개별상담을 하다가 내가 학원을 그만 둔 사실을 들으시고는 밤에 열람실에서 야간자율학습 (이하 야자)를 하라고 권유하셨다. 나는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건만 선생님은 빨리 다니라고 야자출석명부에다가 좌석 앞에 내 이름을 바로 집어 넣으셨다. ㅡㅡ; 그래서 결국 야간자율학습을 강제로 10시까지 하게 되었다,,, 야자를 하면서 그 당시 느낀 것이었지만,,, 우리 담임 선생님에게 너무 고마웠다,,, 그렇게 야자라도 강제로 안 하면 내가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가끔씩 인터넷에서 야자를 폐지해달라 뭐 그런 글을 보고 하는데,,, 그런 글을 볼 때면 피식한다,,,

1학년 야자를 할 때는 졸지는 않은 걸로 기억한다,,, (2학년 때는 야자시간에 계속 잤지만;;) 나름 열심히 한 것 같았다,,, 그래서 고2 올라가기 전 마지막 모의고사를 보게 되었다.


▲ 고1 11월 전국연합 모의고사 결과다,,, 이번에 인증을 할려고 성적표를 꺼내서 보니 내가 수학을 80점 만점에 34점을 받은 적도 있는 걸 보고 놀랐다,,,움,,, 뭐 100점 만점일 때는 25점도 받아봤는데 뭐 -_-;; 언어는 역시나 학교에서나 내가 따로 공부할 때의 문제집 풀기로는 효과가 없었으며 외국어는 공부를 하니 좀 오른 거 같았다.

■ 문이과의 갈림길에 서서

그리고 1학년 겨울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바로 사건이 하나 터진 것이다,,, 바로 문과와 이과를 갈라야 되는 것이었다,,, 문과와 이과라,,, 인문계와 자연계,,, 사실 그 때까지 나는 나 자신에게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럴 것이 학교도 그냥 학생이나 의무적으로 다니는 것이었고 게임에나 빠져서 내가 장래의 무엇을 해야될지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엄청나게 고민한 것 같았다,,, 학교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들어오셔서 문이과 결정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학생들 있으면 들으라고 얘기를 해주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편파적이었다. 1줄로 요약하자면 \'문과가면 할 꺼 없고 이과가면 할 꺼 많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선생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크게 와 닿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쪽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까,,, 그 날 이후로 문이과 선택을 위해서 정말 별짓을 다 했다. 일단 적성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인터넷에서 그 당시 있던 적성검사란 적성검사는 모조리 다 한 거 같았다.

이런 것도 쓰기는 뭐했지만,,, 솔직한 수기를 위해서 다 쓰려고 한다,,, 문이과 진로 고민 도중,,, 모 신문상에서 사주팔자를 보아서 매일매일 그 날의 운세를 쓰는 역술가에게 상담을 의뢰하게 된다,,, 비용은 5만원이었던 걸로 기억,,,



▲날짜에 주목하시라고 인증을 하였다. 2002년 11월로서 내가 문이과 고민을 계속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너무나 고민이 컸었던 흔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역술인은 날  문과 80% 이과 20%라고 하였고 이과로 가면 후회한다고 그랬는데 그 당시에는 그걸 믿지 않았다,,, 그런데 고3 때 문과로 바꾼 후 이메일함을 정리하면서 이 메일을 다시 보게 되면서 정말 섬뜩했다,,, 정말 운명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최종적으로 확정을 해야 되는 기간이 1학년 겨울방학 하기 전까지였다,,, 나는 정말 매일 밤을 새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지금도 걸려있는 불면증은 아마 이 때 걸린 것으로 기억한다,,, 문과와 이과 둘 중 하나를 정말 확실하게 가야지만 내 인생이 제대로 결정나는 줄 알았다,,, 진짜 미치도록 고민한 걸로 기억한다,,, 일단 나의 관심분야는 사회 쪽에 있었다. 옛날부터 역사 쪽도 좋아하고 사회 분야도 좋아했다. 과학은 정말 싫어했다. 언어와 외국어는 싫은 건 아니었고 수학은 좀 싫었다. 완전 문과스타일이었지만,,,

그리고는 이과 쪽에 내가 적성이 맞을까를 생각했다,,, 이 글을 보는 분은 아마 웃으시겠지만,,, 내가 이과에 얼마나 잘 맞는지를 생각해보기 위해서,,,기계를 얼마나 잘 다루는 지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평가의 기준 중 하나로 내가 어렸을 적에 다뤘던 장난감인 LEGO까지 생각해냈다,,,ㅡㅡ;; 생각해보니까 LEGO를 갖고 순서도를 보며 그대로 건물 짓는 것 뿐만 아니라 창의적으로 건물짓는 일을 참 잘한 거 같았다,,, 그래서 이과에의 적성도 어느 정도는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진짜 지금 생각하면,,,ㅋㅋ지만,,, 그 때는 그런 생각까지 할 정도로 문이과 선택에 있어서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LEGO를 생각하면서 기계 다루는 정도까지 생각했지만 공대를 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과로 가면 오로지 허준처럼 한의사가 되는 길을 택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나의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있었으니,,, 내 적성이 문과임을 나 스스로도 많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문과로 가서는 이과에서의 한의사처럼 딱 정해서 하고 싶다는 것이 없었다는 것,,,

종이에 써내고 나서 방학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이 교무실을 들락날락했는지 모른다,,, 교무실 앞에는 화장실이 있었는데 항상 문과를 이과로, 이과를 문과로 바꾸겠다는 말을 하기에 앞서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미리 선생님께 말씀 드릴 것을 연습해서 용기를 내어 교무실 문을 두드리고 선생님을 뵈어 말씀을 드렸다,,, 처음에 이과로 정했다가 그 날 밤새서 고민해보니 적성이 아닌 듯 싶어서 다음날 가서 문과로 바꾸겠다고 말씀드리고,,, 또 그날 밤새서 고민해보니까 문과가 아닌 거 같아서 다시 이과로 바꾼다고 말씀드리고,,, 이 때 한 10번 가까이 한 것 같았다,,,

선생님도 뭐 이런 녀석이 있는지 좀 황당해하셨지만 그대로 아직 반배정 전산처리가 되지 않은터라 바꿀 수 는 있었기에 딱히 뭐라고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나를 지켜봐오면서 문과가 맞음을 확신하셨지만 내가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계속 과를 바꾸고 밤새 고민을 하고 그러니까 보다 못한 어머니께서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하셔서 최종적으로 문과로 정하도록 부탁하셨다,,,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셔서 최종적으로 문과에 배정됨을 알리시고 더 이상 바꿀 수 없다고 말씀을 하셨다.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찝찝했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문과로 정해진 채에 고1 겨울방학을 보내게 된다,,,

■ 고2 시작과 더불어 문과에서 이과로,,,

이제 과가 정해졌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겠건만,,, 공부를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고민에 휩쌓여서 살았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장래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도저히 그런 생각들을 하느라 공부에 집중할 수 가 없었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문과 계통인지 이과계통인지만 알면 끝나는 것을 그것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학을 맞이하기 얼마 전,,,인터넷을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과에서 문과로 가기는 쉽지만 문과에서 이과로 가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왜냐하면 이과에서는 2학년 때 수1과 더불어 수2를 배우고 과탐을 배우는데, 이과에서 문과로 전향할 시에는 사탐이 과탐보다 덜 힘겨워서 1년이면 할 수 있을뿐더러 수학에 대한 부담이 없어지기 때문이란다. 만약 문과에서 이과로 전과를 할 시에는 수2를 해야 될뿐더러 과탐을 새로 해야되기 때문에 그 압박이 너무나 심하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안 순간 나는 또 개학날 까지 고민을 하였다,,, 그리하여 3월이 되어 개학한 날,,, 나는 2-2반인 문과반에 배정되었다. 우리 지역이 작고 또 학교도 소규모라서 한 학년에 140여명 밖에 되지 않았고 문과 80여명, 이과 60여명 정도로 배정된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 얘들은 1학년 교실에서 자기 사물함을 가지고 와서 뒤에 정리하고 교실을 청소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그 날 전날 밤에 고민한 끝에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을 가지고 교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2학년 부장선생님에게 가서 문과에서 이과로 바꾸겠다고 용기를 내서 말씀을 드렸다,,,

2학년 부장선생님은 황당해하셨다. 이미 전산처리가 완료되었는데 이제 와서 말하면 어떡하느냐, 너 때문에 다시 작업을 하나하나 해야 되지 않느냐, 정말 확실하게 결정한 것이냐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순간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이과로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고,,, 선생님은 \"좀 번거로운 작업이지만 할 수 있으니까 해주겠다.\"라고 하셨다,,,

드디어 내가 이과반이 된 것이었다,,, 다시 2-2반 교실로 돌아온 내가 부장선생님의 지시를 기다리며 2-2반 담임 선생님의 종례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부장 선생님이 오셔서 책상을 들고 2-4반으로 이동하라고 말씀을 해주셨다. 이미 2-2반 선생님께는 먼저 얘기가 전해져있었고 2-2반 친구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가 부장 선생님이 교실에 오셔서 얘기해 주시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날 책상과 걸상을 들고 2-4반 교실로 올라갔다,,, 2-2반에 있던 나의 중학교 친구들이 내 책걸상을 같이 날라 주었다,,, 그 친구들과 떨어진 다는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나는 이과에 가서 공부를 해보고 정 나랑 맞지 않으면 문과로 옮기겠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미련없이 이과로 올라갔다,,, 그리고,,, 이과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 이과에서의 생활과 좌절

부장선생님은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린 나에게 \"이과로 바꿔줬으니까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해주셨다. 그리고 내가 몸담게 된 2-4반의 담임선생님이시던 김ㅇㅇ 선생님은 우스갯소리를 하시면서 \"내가 좋으면 진작 좋다고 말하지~.\" 이러시면서 농담도 건네셨다. 이과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이제 정신을 차리자는 각오를 가지고 공부에 임하기 시작했다,,, 일단 나의 취약 과목인 수학을 파기 위해서 수1을 잘 가르치는 학원에 등록했다. 나 혼자 수1을 해낼 수 없을 꺼라는 두려움이 그 당시 너무나 강했었고 어머니께서도 나 혼자 공부를 한다는 것이 힘겨운 것 같아서 그렇게 결정을 내려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선택이었다. 공부라는 것을 내가 왜 두려워했는지, 그리고 왜 내가 스스로 못 할 꺼라고 그렇게 믿었는지,,, 그리고 항상 부모님이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같다. 자식이 혼자 하면 힘들까봐 학원과 함께 공부를 시키시려는 거,,, 내가 다닌 학원은 수학만 가르치는 단과학원이었는데 우리 지역은 소도시인라 비용이 싼지 한 달에 6만원이 들었다. 야자가 10시에 끝나면 같은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과 학원 버스를 타고 가서 학원에 도착 10시 20분~11시 20분 정도까지 수업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에는 수업을 열심히 들은 것으로 기억한다, 정석을 가지고 수업을 했는데 선생님이 앞에서 개념설명과 문제를 푸셨고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이해하느라 바빴다, 지금 생각하면 참 뻘짓이었는데 그 이유는 개념이해와 문제 푸는 것 모두 본인 스스로가 능히 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학원을 다니면 예습, 복습 안하면 말짱 헛꽝이라고 하는데 남이 이미 한 번 요리를 해허 보여 준 것을 다시 요리한다고 해서 자신의 요리 실력이 늘어날까? 그렇게 시간 오래 들여서 할 필요가 있을까? 혼자 한 번에 스스로 이해를 하면 시간도 절약되고 기억도 더 오래가며 실력이 훨씬 향상되는 것인데 말이다,,,

물론 이 때는 내가 공부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나 역시 다른 평범한 학생들처럼 어딘가에 의존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했기에 이랬다,,, 그 학원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와 다시 재회하게 되면서 공부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학원을 가면 그 친구들과 스타크래프트 얘기로 온 종일 시간을 보내거나 학교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서로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평일에 학원을 다니고 학교에서 10시까지 의무적으로 야자를 하게 되니 내가 컴퓨터를 할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평일에는 게임을 1판 정도밖에 할 수 없었고 그 이후에 2시 정도까지는 누워서 스타리그 재방송을 시청했다. ㅡㅡ; 지금도 생각하면 안타까운 것이 우리 집의 잘못된 가구 배치다,, 자는 방에는 TV를 두면 안 되고 공부방에는 절대로 컴퓨터를 두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가구배치의 정석중의 정석이다. 그런데 우리집은 공부방에 컴퓨터가 있고 자는 방에 TV가 있었다. ㅡㅡ; 덕분에 나는 자기 전에 \'스타리그 한 겜만 보고 잘까?\' 하는 생각에 TV를 켠 후 스타리그 전체 경기를 다 보고 나서 잠이 들었다,,,ㅡㅡ

중독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고,,, 컴퓨터를 안 하게 되니 스타리그 보는 것에 중독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평일에는 새벽 2시 조금 넘게까지 스타리그를 보는 것이 내 일과였다. MBC게임 (그 당시에 겜BC로 기억함 맞나?? -0-ㅋ)과 온게임넷으로 골고루 번갈아가면서 참으로 열심히 본 거 같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2003년 올림푸스 스타리그 16강 임요환 선수와 이재훈 선수의 경기,,, 임요환 선수의 기요틴맵에서의 필살 바카닉으로 인해서 이재훈 선수가 아무 힘도 못 쓰고 GG를 쳤던 그 경기를 새벽에 하는 재방송을 통해서 보고 열광한 게 기억이 남는다,,, 그 때 그 경기에서 캐스터였던 전용준씨가 말을 속사포처럼 빨리 하는 바람에 전용준씨는 네티즌들로부터 \'MC용준\'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전용준씨의 그 속사포같은 해설이 여러 가지 음악 버전으로 나와서 장안에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스타리그는 고3 때는 1학기까지 가끔식 보고 여름방학부터는 아에 끊어 버렸다.)

학교생활은 그럭저럭 보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개그캐릭터 (위의 1학년 내용에서 얘기한) 친구들이 2-4반에 같이 올라와서 1학년 때처럼 반 분위기를 붕 뜨게 만들었다. 나는 이번에는 그런 것에 잘 안 넘어가고 공부에 집중할려고 했지만 환경이 무섭다고 걔네들이 자꾸 개그를 할 때마다 같이 웃고 떠들고 그랬다 -_-;; 우리 학교에서는 아침에 EBS방송을 틀어줬는데 나는 집에 바로 옆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EBS시간 도중에 교실에 들어왔다. 등교시간이 7시 20분까지였는데 나는 8시 10분쯤, 그러니까 EBS가 다 끝날 때쯤 학교에 왔다. 아무리 해서 6시 30분 기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항상 새벽 2시 넘게까지 스타경기를 보고 잤으니,,,-_-; 그래서 기상은 7시 30분~40분쯤에 하고 아침을 먹고 여유롭게 학교에 간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에는 늦을 때마다 뛰었지만 늦게 가면 그냥 종아리 한 찰 맞는 게 전부여서 차라리 잠을 더 자고 늦게 가는 것으로 결정한 듯 싶다. (스타 안보고 잠을 일찍 자면 되었을 것을 ㅡㅡ;)

이과에서의 공부는 참으로 어려웠다,,, 특히 언수외 과탐이 다 부족한 나로서는 이것저것 다 조금씩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1학기 때 수학1을 떼고 2학기 때 수학2를 뗀다는 이과 커리큘럼에 나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위의 인증샷에서 보셨겠지만 내가 1학년 마지막 시험에서 받은 수학 점수가 34점이다,,, 이미 우리 반에서 기숙사 특반 얘들은 수1은 벌써 다 떼고 1학기임에도 불구하고 수2를 공부하는 얘들도 많았었다,,, 그런데 그런 얘들을 보면서 그저 대단하다고 여겼을 뿐이지 뭔가 자극 같은 건 받지 못했다, ㅡㅡ; 수학1은 학원에서 진도를 나가고 학교에서도 나갔지만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학교수업시간에 수학1 시간에만은 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들었는데 선생님의 설명이 느긋함에도 그 당시 나의 수학적 이해력이 너무나 딸리는 바람에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0-;

수학과 더불어 나를 괴롭히던 과목이 바로 과탐이었다.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나는 과탐을 싫어하지만 드라마 \'허준\'에서 받은 순간적인 충동으로 한의사가 되고 싶어서 이과로 온 학생이었다. 그래서 과탐을 싫어했지만 좋아할려고 노력했고 또 잘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과탐 역시 수학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짜,,, 너무 괴로웠다,,, 재미도 하나도 없고,,, 물론 이건 내가 중학교와 고1 기초가 안되어서 또 힘들었던 점도 부인할 수 없었고,,,

특히 생물은 그래도 30점대를 좀 넘겨봤는데 물리는 죽어라 해도 20점대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화학은 20점대도 있었고 30점대도 있었고 골고루 했다. 그 당시 과탐 1과목을 3개 선택하여서 모의고사를 봤는데 나는 항상 과탐을 130점대를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3과목을 보니까 3과목 점수 X 3분의 4를 해서 200점 만점으로 점수를 냈는 시절이었다,,, 나랑 비슷한 언수외 실력은 가진 이과 얘들도 과탐 3과목 중 1과목은 40점 넘는 게 있었는데 나는 40점을 넘는 과목이 다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점점 과학이 싫어지고 힘들어졌다,,, 하기가 싫었다,,,

언어영역도 문제였다,,, 언어영역은 사설은 항상 60~70점대였고 도무지 80점을 한 번도 넘기지를 못했다. 전국연합 꺼는 그래도 70점대를 나름대로 유지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 당시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K강사의 언어영역 비문학 구조독해 테이프 강의를 사서 들었는데 이 걸 하고 나서 시험을 보면서 줄 치고 접속사에 동그라미 치느라 3지문을 날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ㅡㅡ; 와 진짜,,, 그렇게 해서 언어영역 100점 받으면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독서를 해 온 친구들이 억울하지,,, 언어영역이 인강이나 과외나 학원을 다녀서 성적이 오른다면 그 것은 당신이 다른 방법으로 성적을 올렸을 때 마침 인강이나 과외나 학원을 다녀서 그 것 때문에 언어영역 성적이 올랐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언어영역은 글인데 자기가 글을 읽는 속도와 이해력을 늘리려면 독서를 하는 수밖에 없다. 독서를 하게 되면 한 눈에 볼 수 있는 문장의 길이 (전문용어로 \'시폭\'이라고 한다.) 가 늘어나게 되고 그걸 빠르게 인지하면서 인지능력 또한 향상된다. (서울대 새터에 갔을 때 얘들이 속독을 하는지 궁금해서 물어 봤는데 한 번에 2줄을 읽는 친구가 있었다. 언어는 항상 90점을 넘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는 나의 속발음 장애 (속으로 읽지 않으면 문장이 뇌에 인식되지 못 하고 그냥 그림을 보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얘기를 듣고 나서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독서를 많이 해서 고칠 수 밖에는 없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삼수 때 눈 -> 속마음 -> 뇌로 읽는 속발음 장애 때문에 속독 (눈 -> 뇌)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읽은 책을 보니까 옛날에 이황과 이이 선생님은 모두 한 번에 5~7줄(조선시대에는 세로로 글이 적혀 있었는데 그걸 5~7줄이면,,, -0-)을 읽었다고 하였다. 5살도 안 되서부터 몇 십년을 하루 종일 독서만 하니 시폭이 넓고 한 번만 책을 읽어도 책의 내용이 구석구석 기억이 날 정도의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속독 책을 보면서 노력을 했건만 그런 걸로 고쳐지면 평생 독서를 해 온 친구들이 억울하지 ㅡㅡ; 뒤에서 계속 얘기가 나오겠지만 나는 항상 언어영역 시간이 딱 맞거나 아슬아슬했다. 점수가 오른 것은 독서를 통해서 그리고 알게 모르게 길러진 사고력의 비약적인 향상 때문이었다.)

06년 서울대 수시 2학기 논술 최고 득점자인 여학생처럼 \'냉소적 이성비판\'이나 \'제 3의 물결\'같은 책을 어렸을 때부터 읽어봐라. 당신이 수능 언어영역과 논술을 못 할 꺼 같은가?? 글 읽는 속도와 이해력과 사고력을 늘지 않을까? 물론 이 당시 나는 독서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구조독해 강의 테이프를 듣는 뻘짓을 계속 했지만,,, 그런 시행착오가 있었기 때문에 고3 2학기 때부터 언어영역은 \'독서\'라는 것을 전부로 생각하고 \'독서\'로 언어공부를 하였다.

이과에서의 모의고사 점수는 항상 500점 만점에 280~320점 사이였다,,, 내가 이과에서의 성적표도 인증샷으로 올리고 싶었는데 찾아보니까 남아 있는 것이 12월 4일 수능예비평가 밖에 없다,,, 내 생각인데 아마 2학기 때 시험을 망치고는 캐안습 점수들이 담긴 성적표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성적표를 버린 모양이다 -_-;; (맞는 거 같다, 왜냐하면 집에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과탐은 항상 120점대였고,,, 언수외가 200점이 되는 경우가 있고 안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과공부가 너무 재미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공부자체가 싫었다고 하면 되겠다,,, 나는 입으로만 한의대를 부르짖는 \'입스타 (스타크래프트 커뮤니티에서 쓰이는 전문용어로서 입으로만 지끼면서 실상은 아무것도 아닌 그런 게임유저를 일컬음)\'에 불과했다,,, 학교 야자시간에는 계속 졸다가 선생님이 계속 깨워주시느라 바빴다,,, 얘들도 내가 지나치게 잠을 자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도 빠짐없이 온게임넷과 MBC게임을 보고 늦게 자니,,,ㅠㅠ

시간은 흘러서 2학기 되었고,,, 나의 성적은 당최 오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력도 좀 부족했지만 내가 수학과 과학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정말,,, 물리 잘하는 분들 존경한다,,, 왜냐하면 나도 이과에서 물리를 해봤지만 물리만큼 어려운 과학은 내가 살아오면서 보질 못했기 때문이다,,, 1학년 때는 공부를 안해봐서 몰랐는데 2학년 올라와서 나름 공부를 해보면서 내련 결론이어었다,,, (올해 07 수능 물리2 만점자가 9명으로 알고 있다,,, 그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0-ㅋ) 그리고 수학에서 공간도형 잘하는 머리 좋으신 분들,,, 존경한다,,, 수학을 위해서 태어났고 또 그에 맞는 머리를 가지신 분들이라고 밖에는 말 할 수 없다,,, 공간도형에 대해서 나중에 이과 친구들과 후배들을 통해서 나름 의견을 들었는데 \'수학적 머리의 싸움\'이라고 밖에는 말 할 수 없는 거란다,,,

2학기에 오면서 왠지 문과로 가야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나름 열심히 하였다,,, 스타보는 것을 끊지도 못하고 학교에서 조는 것도 고치지 못했지만 많이 줄이긴 줄였다,,, 공부를 하면 수학과 과학을 집중적으로 열심히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0월 달 모의고사를 보게 된다,,, 그 결과는 너무나 암울했다,,,


▲ 내가 쓴 일기의 한 부분,,, 일기는 2학년 2학기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모의고사 같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 당시에 나랑 막장다툼을 하던 친구가 나를 누르고 301점을 받았다,,, 둘 다 이뭐병이었지만 나로서는 나름 열심히 했는데 성적이 오르질 않으니 너무 괴로웠다,,,

좌절의 연속이었다,,, 과탐은 해도해도 200만점에 총점 130점대 이상으로 가볼 수가 없었다. 물리와 화학이 범위가 넓어지면서 도저히 내 머리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생물1은 그렇게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고 어느 정도 해서 30점대를 유지했는데 화학1은 뒤에 탄소화합물(?)인가 하는 거에서 쓰러졌으며 물리는 뭐,,, 앞부분부터 이미 계속 쓰러졌으니 할 말이 없었다,,, 공부를 수학과 과학만 중점적으로 했는데도 되지 않았다,,, 이과니까 과학을 좋아할려고 했었는데 그게 참 안됐다,,, 좋아할 수도 없었고 또 못 했다,,, 나는 항상 모의고사가 끝나는 날이면 친구들과 스타를 하러 PC방에 가곤 했는데 이 날 이후로 모의고사를 치고 나서 스타를 하러 PC방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허접취급을 받았다,,, 우리 학교에는 공부 잘하는 얘들을 좋아하는 선생님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는데 내가 언어시간에 졸면 \"거기 얼굴 허연놈 고개 좀 들어봐요~.\" 하고 개그맨 격인 언어선생님이 코믹한 분위기를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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