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은허접해도꿈만은 [36208] · MS 2003 · 쪽지

2007-03-03 18: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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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은 허접해도 꿈만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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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 않을 꺼 같은 그 날이 도래했다. 결전의 날 05 수능!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항상 어머니가 깨워주시지 않으면 나 혼자 일어나지 못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저절로 눈이 떠지다니 신기하기만 했다. 내 몸이 오늘이 수능인 것을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어머니는 나의 아침과 점심에 가지고 갈 도시락을 준비하시느라 일어나 계셨다,,, 나는 일어나서 씻고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어제 밤에 자기 전에 준비해 둔 주민등록증과 수험표와 준비물 같은 것을 다시 한 번 재점검하고 옷을 입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드디어 수능이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7시 40분쯤에 집을 나선 것으로 기억한다. (세 번의 수능을 쳤던 날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건 내가 너무나 그런 순간들에 대한 애착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 차를 타고 부모님과 함께 나는 내가 시험을 치르는 학교로 갔다. 차를 타고 가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잘 할 수 있을까? 대박낼 수 있다,,,!’ 라는 생각을 계속 하였다. 이미 문 앞에는 우리 학교 문과선생님들과 교감선생님이 와 계셨고 기숙사에서 학교 후배들이 단체로 응원을 나와 있었다. 나는 부모님에게  대박을 내서 돌아오겠다고 말씀을 드린 후 차에서 내려 고사장을 향해 갔다. 차에서 내려서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손 선생님과 더불어 다른 선생님들과 한 번씩 악수를 하고 격려의 말씀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입구에서 고사장을 향해 걸어갔다,,,

이미 교실에 가보니까 많은 학생들이 와 있었다. 내가 거의 꼴찌로 온 것으로 기억한다,,, 8시쯤 도착하였으니까,,, 나의 자리는 교실 제일 왼쪽 줄의 가운데 줄이었다. 자리 운은 정말 좋은 거 같았다. 한 쪽에 벽이 있는 자리를 원했는데 딱 원하던 곳에 걸린 것이었다. 예비 종이 울리고 드디어 모든 학생들이 긴장상태에 돌입했다. 나는 호흡을 고르면서 1교시 언어영역 시험을 준비했다,,,

드디어 종이 울리고,,, 언어영역 시험 시작! 듣기를 집중해서 들었는데 1번의 그림과 같이 나온 듣기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 1번부터 막히다니,,,ㅠㅠ (그 문제는 1점 짜리였고 틀렸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내리 6번까지 침착하게 들었다,,, 그 뒤로는 정말 정신없이 풀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에게 있는 집중력의 모든 것이 바로 수능 시험장에서 나온 것 같았다,,, 지문을 읽고 생각하고 답을 내리고,,, 쉽다는 생각도 안 들었고 그렇다고 심하게 어렵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그저 열심히 내가 9월 이후에 해 온 독서를 한 효과를 충실하게 기대하면서 문제를 풀어 나갔다. 60번 까지 다 풀고 마킹을 끝내니까 1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언어영역 시험을 끝낼 수 있었다. 예상대로 독서가 엄청난 효과를 가져다 준 느낌이 들었다,,, 옛날보다 훨씬 글을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잘 친지 잘 못 친지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1교시가 끝나고 밖에 나와서 친구들과 얘기를 나눴는지 조금 쉽다고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보통이라고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다들 의견이 분분했다, 밖에 나와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다음 2교시 수학 시험을 준비했다,,,

2교시 수학시험 시작,,, 수학은 정말 한이 맺힌 정도를 넘어서 나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과목 중 하나였다. 인강을 끊고 나서 내 머리로 열심히 풀었지만 9월 평가원 49점의 충격을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있었기에 이번에는 정말 잘 하고 싶었다,,, 하나하나 정확하게 읽고 풀어 나갔다. 아,,, 그런데 갑자기 시험 문제들이 마구 막히기 시작했다,,, 특히 수리 나형 14번 순열과 조합문제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잡아먹은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결국 이 문제는 못 풀고 찍어서 틀렸다.) 정신없이 풀었지만 안 풀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있는 힘을 다 해서 풀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고 이미 시간을 다 쓰고 말았다,,, 몇 개의 문제를 찍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정말 많이 찍었다,,, (찍어서 맞은 것이 3문제였으니 얼마나 많이 찎었는지 알겠는가?,,,) 결국,,, 수학을 극복을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시험을 치고 나서 힘이 쑥 빠졌다,,,

친구와 점심을 먹고 나서 3교시 외국어 영역에 돌입했다. 먼저 듣기가 나왔는데 정말 초집중을 해서 들었다. 수능시험장에서 이렇게 집중이 잘 되다니 역시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는 사실이 새삼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듣기는 에매모호한 것이 몇 개 있었고 완전 모르는 것이 1개 있었다. (완전 모르는 그 1개를 틀리고 에매모호한 것은 다 맞았다 -0-) 이제 남은 문법과 독해를 풀었어야 했는데,,, 아니 세상에,,, 이게 뭐야,,, 문법이 5개가 등장한 것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평가원에서 이런 스타크래프트의 치즈러쉬 (초반에 SCV와 마린을 총 동원하여 러쉬를 하는 극초반 공격) 스러운 예상치 못한 전략을 쓰다니,,,-0- 너무나 당황하였다,,, -0-

그런데 다시 시험지를 보니까 문법 3개에 어휘 2문제였다,,, objective와 objection, adapt와 adopt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정말 놀라운 것은 K교주님의 피니싱 터치에서 예언한 sit는 자동사이고 seat는 타동사인 것이 나온 점이었다. (그 문제는 앞에 objection과 objective를 정확히 몰라서 틀리고 말았다 ㅡㅡ;) 문법은 너무 힘겨웠다, 안 그래도 문법이 이뭐병이었는데 수능에서는 정말 정신없이 문법에서 시간을 많이 끌었다,,,

독해지문은 한 번에 읽히지 않아서 2번 이상 읽는 것이 너무 많았다, 해석도 잘 안되고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이해가 안되는 것이 많았다,,, 그래도 빨리빨리 풀어나갔다,,, 제일 뒷장에 가니까 장문독해가 있었는데 47번과 48번을 풀 수가 없었다. 단어를 보고 통밥으로 추리를 해보니까 오페라와 관련된 얘기 같았는데 도무지 해석과 이해가 안 되었으며 48번에는 refine이라는 단어를 처음 봐서 황당해 했다. (능률 보카에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 이 글을 보시는 분은 영어단어는 제발 능률 보카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능률 보카 어원편에서 동의어, 반의어 같은 것도 모두 꼼꼼하게 공부를 한다면 수능을 칠 때까지 필요한 어휘 중에서 70%는 채울 수 있다고 장담한다. 나머지 30%는 이제 따로 독해 문제집 같은 것을 공부하면서 습득해야 한다.) 결국 시간이 부족해서 이 2문제는 찍어 버리게 되었다. (2문제 다 찍었는데 다 틀렸다,,,ㅡㅡ)

외국어 시험이 끝나고 이제 4교시 사탐을 치게 되었다. 내가 선택한 사탐은 국사, 근현대사, 경제, 사회문화 순이었다. 국사는 내가 아는 것이 굉장히 많이 나온 느낌이 들었고 근현대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때는 문제가 쉬워서 시간이 많이 남았으나 지엽적 + 추론을 요구하게 나온 07수능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경제를 풀 때는 많이 고전했다, 9월 달에 경제를 6등급 받은 충격이 아직도 생생했는데 다행히 수능은 사설보다는 깔끔한 느낌이 들었다. 제 시간 안에 겨우 풀게 되었다. 사회문화는 항상 이랬다 저랬다 하는 과목이었다. 5월 종로 월례처럼 뽀록으로 50점을 받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9월처럼 6등급을 받는 경우도 있었으니 참으로 거시기한 과목이었다.(그 날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사회문화 치는 시간에 오줌이 마려워서 참으면서 시험을 쳤는데 사회문화 결과를 보니까 그렇게 오줌을 참으면서 시험을 치른 것이 초인적인 집중력을 만들어 준 것 같다. -0-

사탐 4과목이 드디어 끝이 났다. 너무나 홀가분했다. 이제 수능이 끝난 느낌이 들었다. 제 2외국어가 남아 있었지만 나는 제 2외국어인 한문공부를 따로 하지를 않았다. 아니 다른 과목을 하느라 제 2외국어 과목을 공부할 수 가 없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원래 알고있던 한자들을 긁적이면서 앞에 것은 좀 풀었는데 뒤에 지문들은 공부를 안 해서 다 처음 본 것들이라서 다 찍어버렸다. 남은 시간은 이면지에다가 이때까지 공부한 것을 생각하고 또 오늘 수능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나름대로 상상해서 글을 썼다.

종이 울렸다. 드디어 05수능의 끝을 알리는 소리가 난 것이었다,,,!! 우리 반에 있는 모든 학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선생님들의 정리하는 시간이 끝나고 모든 학생들이 교실을 나갔다. 나는 내 친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 날 밤을 아직도 기억한다,,, 맑은 하늘에는 반짝반짝 별이 빛나고 있었고 밖에서는 수험생들을 기다리는 부모님, 그리고 선생님들이 기다리시고 계셨다. TV로만 보았던 수능 시험이 끝난 직후의 현장을 이렇게 내가 수험생이 되어서 직접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기만 했다. 어둠 속에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담임선생님은 밖으로 나오는 나를 보시고 수고했다고 등을 두드리며 격려를 해주셨다. 나는 선생님께 목례를 하고 친구랑 같이 우리 아버지 차를 타고 그 친구를 집에 내려주고 바로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부모님과 동생은 오늘 시험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기시고 계셨다. 나는 잘 모르겠다는 대답으로 일축했다,,, 사실 시험이 어땠는지는 정말 몰랐다,,, 빨리 매겨봐야 알 꺼 같았다,,, 부모님과 동생에게 오늘 시험을 치렀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맛있게 고기를 먹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컴퓨터를 켜고 메가스터디에 접속을 했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수험표 뒤에 적어온 정답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1교시 과목인 언어영역을 다 매기고 나서 확인 버튼을 눌렀다,,, 너무 떨려서 모니터를 손으로 가렸다. 일단 화면이 바뀐 것을 어렴풋이 확인하였다. 이제 손을 내려서 마우스 커서를 위로 올려서 점수를 보기만 하면 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손을 내리고 모니터를 보는 순간,,,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93점! 90점을 넘은 것이었다,,, 와하~!! 너무 기뻐서 내 방에서 계속 방방 뛰었다. 나의 2달 반 꾸준히 1시간씩 신문 읽고 1시간은 문학을 읽은 독서 작전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었다. 너무나 기뻤다,,, 언어는 6월 종로에서 59점을 받고 5등급도 받아봤고 9월 모의평가에서도 70점 중반의 3등급을 받아서 괴로웠었는데 드디어 1등급을 받을 수 있을 꺼 같았다.

이 여세를 몰아서 수학을 매기기 시작했다,,, 수학은 솔직히 좀 자신이 없었다,,, 너무 많이 찍어서,,, 찍은 것 중에서 많이 맞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 체크를 한 후에 확인버튼을 눌렀다,,, 손을 치우고 떨리는 마음으로 점수를 바라보았다,,, 69점,,, 순간 멍했다,,, 갑자기 화가 났다,,, 안방으로 가서 침대에 누워서 팔로 눈을 가리고 소리 내어 울었다,,, 개념정리 그렇게 열심히 하고 오답노트 꼼꼼하게 하고 정말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70점을 넘기지 못했다,,, 확인해보니까 4점짜리 찍은 것이 3개나 맞았다,,,

만약 저것까지 다 틀렸으면 57점이었을 것이다,,, 꿈에 그리던 고려대가 무너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서러웠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안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11월 달에 수학이 좀 뽀록나고 해서 기대를 했건만 9월 모의평가 49점이랑 나한테는 크게 다를바가 없었다,,, (백분위가 9월 81%에서 수능 84%로 3%만 올랐다,,,) 한 30분을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가 기운을 차리라고 말씀해 주셨고 나는 눈물을 닦고 세수를 한 후에 다시 컴퓨터에 앉아서 남은 영역을 채점하게 되었다,,, 수학을 망하고 나니까 다른 과목들은 이상하게 기대가 되지 않았다. 손으로 모니터를 가리고 확인버튼을 누른 후 서서히 손을 떼서 점수를 보지 않고 그냥 확인버튼 누르고 바로 점수를 보게 되었다. 외국어 영역은 84점이었다. 듣기에서 1개 틀렸고 47번, 48번 찍은 것이 틀렸고 남은 독해와 문법, 어휘에서 4개를 틀렸다. K교주님을 믿고 그렇게 달려 왔건만 결국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다고 해서 K교주님이 못 가르치고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강이라는 자체가 일방통행으로서 인강을 듣는 학생으로 하여금 사고를 바꾸기가 힘들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을 뿐이다.) 그냥 무덤덤했다.

나머지 사탐을 채점하였다. 국사가 47점, 근현대사 48점, 경제가 45점, 사회문화가 50점이었다. 사탐 총점 190점!!! 나름 대박이라고 생각해서 수학에서 봤던 아픔을 나름 중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제 2외국어는 몇 점인지 기억이 안 난다. 어짜피 공부를 하지 않고 다 찍었기 때문에,,,


▲ 05수능 성적표다,,, 외국어 영역은 백분위 89로서 2등급과 3등급 사이에 겨우 턱걸이로 착지했다. 언어는 94점이 1등급이었는데 93점으로 2등급을 받았는데 나에게는 굉장히 잘 한 점수였다. 수학은 백분위 84%로 3등급을 받았다. 그리고 사탐은 사회문화와 근현대사가 1등급이라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총점은 436점을 받았는데 수능을 2달 앞둔 9월 대성에서 365점을 받은 것에 비하면 71점이 오른 것에 만족했다. 비록 고려대는 가지 못하는 성적이었지만,,,

그 날 오르비에서 밤늦게까지 상주하면서 시험 난이도에 대한 글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뭐 어짜피 다들 주관적인 의견이니까 성적표가 나와봐야 아는 사실이었는데도 그런 것을 올리는 사람들이나 그런 것을 읽는 나나 모두 다 등급 컷에 목마른 것은 사실이었다. 오르비에 있는 글들을 보면서 타키로 친구들과 오늘 시험에 대한 채팅을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다들 평소보다 잘 못 본 거 같다고 말을 했다.

수능을 치르고 나서 다음날, 학교에 다시 모였다. 이과에 보니까 학교에 아에 안 와서 선생님이 직접 집으로 전화를 하게 만든 학생들도 몇 명 있었다. 반에 모인 친구들은 선생님이 오시기 전에 수능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1반에서는 누가 잘했느니~ 2반에서는 누가 잘했느니~ 이런 얘기가 떠돌고 있었다. 1반에서 2명이 480점대를 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2명은 문과 1등과 3등이었는데 역시 원래 잘하는 얘들이 수능도 잘 친다는 사실을 그대로 입증해 주었다. 우리 반에서는 하루 종일 잠만 자고 판타지를 속독하던 머리 좋은 친구가 470점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역시 머리가 좋으면 노력을 좀 덜해도 된다는 것을 느끼고는 사실 좀 허탈했다,,,-0-

■ 대학합격과 다시 찾아온 고민의 시간,,,

그로부터 수능 성적표가 나오기까지는 친구들과 자동차 운전학원을 다니고 종일 오르비질을 하느라 정신없이 보내었다. (반수랑 삼수 때도 수능이 끝난 후 오르비 폐인짓을 했다. --;) 그리고 저녁에는 너무나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거 같아서 학교에 갔다. 학교 열람실에 가서 야자를 하고 있는 후배들 사이에서 자동차 운전면허 필기시험 공부도 했고 또 책도 읽었으며 일기도 매일 꾸준히 썼다,,,

수능이 끝난 후 학교 열람실을 꾸준히 간 것은 학교 열람실에 너무나 정이 들었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그 곳에서 일기를 쓰면서 땀흘리며 공부한 시간들을 떠올렸다,,, 세월이 벌써 이렇게 지났는지 정말 신기하기만 했다,,, 후배들은 수능이 끝나고도 학교를 오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나는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선생님이 나에게 수능 끝났는데 왜 왔냐고 물었을 때도 나는 당당하게 “공부하러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학교 열람실이 너무 좋았다,,, 내가 조금만 정신을 일찍 차리고 이곳에서 공부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너무나 컸다,,, 이렇게 좋은 곳을 놔두고 게임으로 밤을 지새우고 학교에서는 잠을 자는 미친 짓을 했던 것이 너무나 후회되었다,,, 그래서 수능이 끝나고 나서도 저녁에는 고3 때 학교를 가서 독서를 하고 일기를 쓰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수능시험이 끝난 뒤 한 달이 지나서 수능성적표가 나오고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진학상담을 하게 되었다. 당시에 인터넷으로 하는 배치표는 몰랐고 학교 교실 뒤편에 붙여둔 배치표를 통해서 살피게 되었다. 일단 내가 수학을 못 쳐서 수학을 쓰는 학교를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살펴보니까 경희대와 중앙대가 있었다. 언어랑 외국어랑 사탐은 그나마 괜찮게 친 거 같아서 해보니까 내가 원하는 법대를 쓸 수가 있었다. 경희대 법대는 점수가 딱 맞았고 (대성배치표로 표점 380점, 아직도 기억한다.) 중앙대 법대는 점수가 조금 모자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과 상담을 하면서 바로 나는 가군에 경희대 법대, 나군에 중앙대 법대를 쓰고 다군에 는 아무것도 쓰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일단 종이배치표와 나의 지망학교와 과를 보시더니 경희대와 중앙대를 쓰시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 원래는 떨어질 것을 염려해서 다른 선생님들은 몇 칸씩 내려서 진학을 권유하셨는데 우리 선생님은 그냥 적당하게 보시고는 허락해 주셨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다군에 건국대 법대를 쓰라고 하셨다. 결국 원서접수는 가군과 나군만 했다. 다군은 그냥 쓰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배짱이 ㅡㅡ;)

■ 논술 치러 간 경희대와 고려대 견학

논술반영률 3%였던 경희대에 논술을 치러 가게 되었다. 학교에서 수능이 끝나고 나서 대성 논술과 면접으로 매달 한 번씩 쓰게 한 논술 모의고사를 몇 번 몰아서 친 것이 논술 공부의 전부였다. 2005년 1월 7일 금요일날 서울에 갔다. 아버지랑 같이 갔는데 청량리역에 도착해서 내려서 인근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8일 아침에 택시를 타고 경희대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경희대 캠퍼스는 아름다웠다. 경희대 캠퍼스가 작다고 하는데 나한테는 많이 커 보였다. 그건 아마도 내가 다녔던 중․고등학교가 작았기 때문일 것이다. 작지만 너무 아름다운 캠퍼스였는데 본관이 마치 그리스 신전과 같았고 평화의 전당이라고 해서 가수들이 콘서트 할 때 자주 이용한다던 그 건물도 보게 되었는데 정말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논술고사는 차분하게 임했다. 영어 지문도 하나 나왔는데 어찌어찌 해석해서 쓴 거 같았다. 논술이 끝나고 나와서 아버지랑 같이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가 청량리역으로 가자고 하셨는데 나는 이때 아버지께 고려대 구경을 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서울에 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까 경희대에서 고려대까지는 택시타면 얼마 안 되는 거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 사실을 아버지께 말씀드리니까 아버지가 같이 가자고 하셨다.

경희대 앞에서 택시를 타고 10분도 안되어서 고려대 앞에 도착했다,,,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내 순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웅장하고 거대한 건물들이 정면과 사방에 널려 있었던 것이었다,,,, 너무나 대단했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그 고대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내가 오늘 논술을 치르고 나온 경희대는 머릿속에 있지도 않았다,,, 아버지랑 같이 고려대 캠퍼스를 한 바퀴 돌았는데 고려대 법대 건물 앞에 왔을 때 뭔가 모를 묘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가 바로 내가 고3 때 세운 최초의 목표였던 고려대 법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을 그토록 밟고 싶었건만,,, 너무나 아쉬워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아버지는 빨리 가자고 재촉하셨지만 나는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캠퍼스를 돌아다녔다. 고려대 캠퍼스의 휘황찬란함에 반해버렸다. 너무나 다니고 싶은 대학교 그 자체였다,,, 돌아다니다가 지하중앙광장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있던 고려대 학생을 보고 아버지께서 “고대생들은 눈빛부터가 다르네.”라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ㅋㅋ 그렇게 캠퍼스 구경을 하고 가슴 한 구석에 고려대에 대한 마음을 잊지 못한 채 나는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오게 되었다,,,


■ 대학발표와 다시 도래한 고민의 시간,,,

대학발표는 2005년 1월 18일 화요일에 중앙대 법대가 먼저 났는데 예비번호 30%안에도 도 못 받았다고 일기에 적혀있다. 그 때의 충격은 너무나 컸다,,, 만약에 경희대 법대도 떨어지면?? 차라리 그렇게 되면 오히려 속시원하게 재수를 해서 고려대를 향해서 다시 달려 보고 싶기도 했다,,, 고려대,,, 역시나 나에게는 턱없이 먼 대학이었다,,, 고3 을 열심히 보냈지만 내 노력과 시간이, 능력이 부족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계속 고려대를 못 간 것 때문에 고2 때까지 쓰레기같이 보낸 시간들을 저주했다,,, 내가 그 때 열심히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너무 컸다,,,

경희대 법대가 발표가 났다,,, 결과는 최초합격이었다. 발표가 예상보다 일찍 났는데 그 당시 네이스 코드라고 해서 학교 코드와 학교 코드 뒤에 있는 4자리가 비밀번호로서 각 학교별 합격자 명단을 대학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는데 내 이과 친구가 그것을 미리 해보고는 나에게 축하의 전화를 날려 준 것이었다. 그 전화를 듣고 나서 기뻤다. 거실에 계시던 부모님께 소식을 전해드렸더니 너무나 기뻐하셨다. 대학에 진학하기도 어려웠던 내가 인서울 중위권 대학을 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좋으셨던 모양이었다. 나도 그 순간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런 기쁨 속에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고려대 법대를 못 간 아쉬움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내 인생 최초의 목표인 고려대 법대,,, 너무나 가고 싶었는데,,, 가고 싶다,,,\' 라는 생각이 너무 간절했다,,,

얼마 후 중앙대 법대도 최종적으로 합격했다. 거의 끄트머리로 되지 않았나 싶다,,, 나는 두 학교 중 선택을 했어야 했지만 중앙대보다는 경희대가 더 끌려서 경희대로 선택을 했다. 학교 네임벨류는 중앙대가 한 수 위였지만 청량리역에서 가까운 경희대가 끌렸다.

경희대에 등록을 하고 나서 너무나 많은 고민을 시작했다,,, 고려대 법대,,, 너무나 가고 싶은 그곳,,, 하지만 나의 실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다시 한 번 내 꿈을 향해서 날고 싶었다,,, 매일 학교 지하 열람실에 가서 일기를 쓰면서 계속 고민을 했다,,, 마치 문과와 이과를 고민할 때처럼 도저히 내가 선택을 할 수 없을 꺼 같은 그런 고민,,,

뒤늦게 시작한 공부는 너무 재미있었다,,, 게임보다도 더욱더 재미있었다,,, \'왜 이렇게 재미있는 것을 이제야 알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너무 컸고 또 고려대 법대를 너무나 가고 싶었다,,, 고민은 계속 되었다,,, 내가 등록을 포기하려면 2005년 2월 17일 점심 12시까지 포기를 해야 했다,,, 매일매일 고민을 계속 했다,,, 도저히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어머니는 문이과 고민에 이어서 또 이런 고민을 하는 나를 보다 못하셨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하고 싶으면 재수를 하라고 하셨으나 내가 자꾸 갈팡질팡하니까  ‘대학가서 열심히 하면 되지 않느냐\'는 쪽으로 말씀해주시면서 그냥 다니시기를 권유하셨다. 차마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문이과 선택 때처럼,,, 도저히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2005년 2월 16일이 지나고 2월 17일. 그 날은 바로 학교 졸업식이었다,,,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도저히 결정을 할 수 없었고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9시 30분까지 학교를 가야만 했다. 등록포기는 팩스를 하면 되었다. 빨리 학교 가기 전에 결정을 해야 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2 때까지 흐지부지 보내버린 나의 인생에 대해서 너무나 후회가 많았다,,, 고려대가 가고 싶었고 수능공부라는 것을 제대로 더 하고 싶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공부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한 가능성에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막상 된 학교를 포기하고 바로 재수를 하자니 용기가 안 났다,,, 결국 결정을 하지 못하고,,, 등록을 포기 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졸업식을 하러 학교로 갔다,,, 나는 마음에서 고려대와 수능공부를 지우기로 결심했다,,,

경희대로 떠나기 전 날 학교 열람실에서 마지막으로 일기를 썼다,,, 그리고 미리 사온 선물을 수위 아저씨께 드리고 인사를 드리고 떠났다,,, 수위 아저씨는 대학생활 잘 하라고 격려를 해주셨다. 학교를 나오면서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나의 고3 시절을 보낸 열람실,,, 너무나 그리웠다,,, 다시 저 곳에서 고려대를 향해 공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가 안 났다,,, 그날 학교를 나와 집으로 향하면서 하늘을 쳐다봤다,,, (나는 지금도 밤에 하늘을 보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 이 습관은 고3 때 열람실에서 매일 12시까지 공부를 하고 집에 오면서 생긴 습관이다.) 수능 치기 전날 집에 갔을 때 본 하늘처럼 하늘에는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수능이 끝난지 벌써 4개월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는 강물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하늘을 바라보며 고려대를 향해 달렸던 그 때 그 시절이 떠올랐다,,, 고려대라는 학교에 대한 열망과 수능을 정복해 보고 싶다는 공부에 대한 열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억지로 누르려고 애를 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 경희대에서 보낸 1학기

경희대에 입학해서 1학기를 보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썼지만 도무지 소속감이 잘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아직도 고려대와 수능에 대한 미련이 너무나 컸기 때문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학교 앞에 있는 고시원에서 살았다. 고시원은 너무 좁디좁았고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학교생활은 법대 내에 있는 학회에 들어서 어중간하게 활동했다. 도무지 소속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겉돌았다고 해야 편이 옳을 것이다,,, 그래도 어떤 모임이 있으면 가급적 꼬박꼬박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소속감을 느끼고 고려대와 수능에 대한 생각을 잊으리라 생각했다,,,

경희대를 다니면서 나는 학창시절 많이 읽지 못한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경희대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리게 되었는데 마침 MBC에서 했던 전설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기억이 났다. 그래서 도서신청을 하였고 책이 들어오는 날짜를 문의하여 그 날짜에 새 책 코너 앞에 있는 책상에 앉아서 ‘여명의 눈동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들어오자마자 1권과 2권을 동시에 빌려 읽었다. (여명의 눈동자는 총 10편의 대하장편소설인데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반드시 읽어보시길 바란다. 내가 삼수하면서 읽은 태백산맥과 견줄 수 있을 만큼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월탄 박종화의 임진왜란 10권을 읽었다. 책을 빌려서 시간 나는 대로 고시원에 쳐 박혀서 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이 때의 독서는 나의 언어영역과 다른 과목 공부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아침에 매일 헬스를 다녔다. 내가 체력이 너무나 달리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헬스를 하면 체력이 좋아질 꺼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헬스를 하면서 오히려 역효과를 보게 되었다. 헬스를 한 날이면 피곤해서 졸음이 쏟아지는 일이 자꾸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ㅡㅡ; 아침에 가서 30분씩 신문을 읽으면서 적절한 속도로 러닝머신을 하고 기구를 좀 들었는데,,, 아침시간대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내 체력이 좋아지기는커녕 기운만 더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0- (나의 체력은 그 이후로 자전거를 꾸준히 타고 많이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좋아지지 않는다,,, 선천적인건가? ㅡㅡ)

어중이떠중이 보낸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계속 고려대와 수능에 대한 미련을 지우려고 했지만,,, 도저히 지우기가 힘들었다,,, 너무나 간절했다,,, 그런데 용기가 안 났다,,, 이미 시간을 흐르고 흘러서 1학기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 다시 한 번

대학교 여름방학이 되었다,,, 내려와서는 친구들과 수영을 등록하고 같이 다녔다. 그렇게 수영을 다니는 한편 영어와 한문공부를 충실하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찾은 곳은 바로 학교 열람실이었다,,, 학교를 방문해서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교감선생님께 허락을 받아서 학교 열람실에서 공부하는 것을 허락을 받았다,,, 너무나 가고 싶었던 학교 열람실,,, 드디어 다시 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나는 빈자리를 하나 맡아서 영어랑 한문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학교 열람실에서 야자를 하는 시간에 있었는데 선생님들도 대학생이 여기 왜 왔냐고 물으셨고 재학생 후배들도 나의 등장이 좀 어리둥절해 하면서 여러 얘기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곳에서 다시 고3 때처럼 2달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매일매일 저녁에 학교 열람실을 다니면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야자를 하는 다른 후배들과 같은 공간 속에서 같은 분위기를 느끼면서 내 머리 속에는 고3 때 이곳에서 보냈던 추억들이 스며들곤 했다,,,

매일 밤늦게 집에 갔다. 학교를 나서면서 오랜만에 보는 하늘은 너무나 반가웠다,,, 서울과 달리 공기도 상쾌하고 너무나 좋았다,,, 고2 때까지의 학창시절을 잘못 보낸 후회가 너무 커서 다시 한 번 고등학생이 되어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는데 그 때 그 꿈이 간접적으로나마 이루어져서 너무 좋았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내가 사는 보람을 바로 열람실에서 공부하는 순간에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 마음 속에서는 매일매일 고려대와 수능을 향한 열망이 커지고 있었다,,, 아직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로 계속 고민했었는데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진짜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어떤 선택을 내릴 때 참 힘겹게 고민하고 결정하는 스타일이다,,, 열람실에서 후배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수능을 향해 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더 간절해 진거 같다,,,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대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역시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만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또 낮에는 친구들과 수영을 다니기를 1달 반이 조금 지나서 어느 덧 8월이 되었다,,, 9월이면 개강을 하고 나는 다시 복학을 해야만 했다,,,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정말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8월 12일,,, 드디어 고민 끝에 결정하였다,,, 수능을 103일 앞둔 시점에 나는 드디어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인생의 최초의 목표였던 고려대를 향해서 다시 한 번 수능을 보겠노라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같이 선택을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이렇게 끝끝내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무장하면서 결심을 하였다,,,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경희대는 아마 제적처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학교를 그만두었다. 경희대를 잊기로 결심하고 내가 그토록 원하던 고려대를 향해서 다시 달리기로 결심하였다,,,


■ 좌절의 연속

결정을 내리고는 바로 공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집에 고이 모셔두었던 개념원리와 소수의 문제집들을 활용하기로 했다, 남은 시간은 100여일이었고 고3 2학기 때 인강을 듣지 않고 독학을 하여서 점수를 올린 것을 생각하여 독학을 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독학을 해야지만 내 머리로 이해하고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어영역은 EBS 수능특강을 품과 동시에 수능기출분석을 하였다. 그리고 수학의 경우에는 수1 개념정리를 개념원리를 3회독 하면서 확실하게 하고 문제풀이를 보태었다. 내가 수학을 못 하는 것이 개념정리가 부족해서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수학은 개념이해가 30%고 발상(수학적 머리)이 70%이라는 사실을 이때는 깨닫지 못하고 삼수를 통해서 깨닫게 된다.)

외국어는 인강을 신봉하다가 피 본 것을 계기로 역시 인강을 듣지 않기로 결심했다. 문제를 잘 풀고 잘 맞히는 것이 K교주님의 머리로 푸는 것이었지 내 머리로 푸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때 마침 나에게 들어온 책상에 꼽힌 교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맨투맨 기본영어였다,,,!! K교주님께서 S종합영어와 더불어서 보지 말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책이었다,,, K교주님이 왜 보지 말라고 하신지 그 이유는 몰랐는데 책 내용구성을 보니 괜찮은 거 같았다. 그리고 영어공부를 체계적으로 하기에는 문법을 우선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맨투맨으로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맨투맨은 인강이나 학교수업을 통해서 볼 수 없었던 영어의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사탐은 이전에 집에 있던 디딤돌 문제집을 복습하기로 했다.

공부는 낮과 오후는 도립도서관에서, 저녁에는 학교 열람실에서 후배들과 같이 야자를 하고 야자가 10시에 끝나면 12시까지 남아서 공부를 했다. 그 동안 좀 길었던 머리를 고3 때 처럼 자르고 간편한 차림으로 다니면서 공부에 심혈을 기울였다. 머리가 길면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를 갖추지 않은 느낌이 들었을 뿐더러 긴머리를 원래 싫어하는 스타일이라서 고3 때처럼 매우 짧게 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울리게 했던 수학을 정복하기 위해서 수학 공부에 5시간 이상을 투자하였다. (내가 체력이 약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좀 힘들었는데 그래도 독학을 했기에 수학에 저만큼 시간을 투자하여도 다른 과목을 하는 시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9월이 되었는데 대학을 가지 않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교감선생님께 8월 달에 말씀을 드렸는데 아직 모르는 선생님들이 좀 계셨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를 알고 있는 선생님이 물으실 때마다 다시 수능을 치느라 대학을 그만두었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몰랐는데 오르비를 통해서 그 당시 알았는데 이렇게 대학을 1학기만 다니고 수능공부를 하는 것을 ‘반수’라고 부르는 것을 알았다. 후배들도 다시 대학을 가지 않는 나를 이상하게 여겼다. 나중에 후배들이 얘기하는 것을 어떻게 하다보니까 들었는데 어찌어찌해서 소문이 퍼져서 내가 대학을 그만두고 반수를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안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알차게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며 보냈다. 그리고 대망의 9월 모의평가를 모교에서 1학기 때 학원을 다니고 고향으로 내려온 친구들과 함께 치루게 된다,,,


■ 정확히 1년 전 치룬 고3 때 모의평가랑 똑같은 총점을 받았다. 아름다운 등급과 백분위들,,, 이 때 시험을 치고 경희대 법대도 다시 가지 못할 점수를 받고는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험을 치고 나서 정신이 멍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보면 나름대로 희망이 보였다. 일단 언어영역이 86점을 받았다. 고3 때 항상 좋아봤자 70점대였던 언어점수가 드디어 80점 중반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읽은 책 20권과 이 당시 읽고 있었던 김용의 무협소설 \'사조영웅전\' 시리즈 전 8권이 엄청난 도움이 된 것 같았다. 고3 때 언어를 잘한 얘들이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열심히 한 얘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꺼 같았다. 문학 쪽의 소설 (무협소설은 아닐 꺼 같지만 무협도 문학이다.) 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문학을 때 대할 때 감정이 풍부해진 느낌이 들었고 매일 아침마다 읽는 신문 덕에 비문학도 예전보다 머리에 정리가 잘 되는 느낌이 들었다.

수학은 이 때 74점을 받았다,,, 물론 백분위 90으로 거의 3등급에 가까운 점수였는데 그래도 고3 때보다 실력이 오른 것은 사실이었다. 고3 때랑 똑같이 공부했는데 왜 실력이 늘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독서를 좀더 하고 개념원리 책을 보면서 개념을 익히고 EBS문제집으로 문제를 풀고 한 것이었는데 점수가 오르고 백분위가 이렇게 나온 걸 보니까 역시 독서를 통해서 전반적인 이해력과 사고력이 늘어났다는 점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고려대 법대를 가려면 수학을 100점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 틀린 문제 중에서 보니까 수학 10-가,나 개념 혼합문제가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남은 2달 반동안 수학 10-가, 나를 하기보다는 수1만 열심히 해도 될 꺼라는 안일한 생각을 또 하게 되었다. (시간적으로 수학 10-가,나를 할 시간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수리 나형 하시는 분들을 새겨들으시길, 수학 10-가,나 잘하는 사람이 수1도 잘 한다, 수학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는 장승수 선배님의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수기책에서도 말하고 있다.) 어쨌든 2달 반이 남은 시점이었지만 열심히 한다면 수학 100점도 불가능한 것도 아닌 거 같았다,,,

외국어 영역은 76점을 받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여름방학 때 해커스 토익으로 학교 열람실에서 나름대로 공부를 했건만 수능 외국어에 대한 감각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특히 이 날 듣기를 6개 틀렸는데 이 후로 나는 마침 동생이 주어온 2채널 스피커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열심히 듣는 연습을 매일 꾸준히 하게 된다. 독해와 문법과 어휘부분은 살펴보니까 역시 고3 때랑 크게 변한 점이 없었다,,, 문법은 지금 보는 맨투맨을 꾸준히 보면서 파사쥬 문법 문제집 1권을 풀기로 했고 독해는 논리적 사고를 열심히 하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어휘부분이 문제였는데 이 점은 바로 이 때 다시 살피게 된 능률 보카를 열심히 외우므로써 어느 정도 해소된다. (능률 보카의 재발견!)

9월 모의평가에서 받은 언수외는 236점,,, 고법을 가려면 언수외 290점대는 되어야하는데,,, 너무나 부족한 점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탐은 국사 32점, 근현대사 34점, 경제 40점, 사회문화 37점을 받았다. 국사랑 근현대사가 너무 어려웠는데 이 당시 문제가 매우 논란이 되었던 것이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고 문제집이나 교과서를 공부해도 모르는 문제들이 많이 나왔다. 국사는 그래도 교과서 안에서 다 나왔는데 근현대사는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좌우합작 5원칙의 내용같이 어디에도 없는 내용이 문제로 나와서 당황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경제는 고3 때 했던 디딤돌 개념서를 반복으로 보면서 EBS 문제집을 1권 썼는데 괜찮게 점수가 나온 것 같았다. 41점이 1등급이었고 내 점수는 40점이었으니까,,, 사회문화는 완전 망했다,,, 개념서는 고3 때 EBS에서 이현 선생님이 가르쳤던 하얀색 인터넷 수능 교재를 기본서로 쓰고 있었는데 틀린 문제들을 보니까 개념부족도 그랬지만 사회문화 특유의 말장난에 많이 넘어간 듯싶었다. 그래서 개념을 정독하면서 말장난에 안 넘어가도록 계속 머리 속으로 각인하고 또 생각했다. (말장난은 머리 속으로 각인한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이때는 몰랐다. ㅡ.ㅡ 궁극적으로 뇌가 바뀌어야 말장난에 넘어가지 않는다.)

9월 모의평가를 치고 나서 공부 방법에 다시 수정을 가했다. 먼저 언어는 지금대로 꾸준히 해 나가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책보는 시간을 좀더 늘렸다. 점심을 먹고는 도서관에 와서 항상 1시간 이상씩 독서를 했다. 그 때 계속 읽고 있던 책이 \'사조영웅전\'이었는데 얘들이 왜 무협소설에 열광하는지 이 작품을 보고 깨달았다. 나는 학창시절에 판타지랑 무협을 읽는 친구들을 시간은 낭비하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나의 커다란 오산임을 나는 몸소 경험했다.

\'사조영웅전\'은 내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줄 정도로 나를 몰입하게 만들었다,,, 너무나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서 점심 먹고는 딱 1시간 읽을 것은 조금만 더 읽자 하다보니까 2시간 읽은 적도 꽤 있을 정도였다,,,-0- 그리고 아침에 밥 먹으면서 신문 20분 정도 읽는 것을 계속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수능기출분석 문제집을 일주일에 하나씩 풀고는 했다. (수능기출분석이라는 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왜 답이 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판단하면서 문제를 푸는 것이다. 수능기출분석만 한다고 점수라 오를 것이라는 착각은 하지 마라. 언어영역은 이런 것보다도 독서를 많이 함으로써 글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빨리 이해하고 기억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더 필요하다. 언어영역 시간에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는 분들, 지금부터 바로 독서를 시작하기 바란다. 문제 풀고 인강듣는다고 자신이 글을 읽는 속도와 글을 읽고 남는 기억, 그리고 사고하는 능력이 늘어날 꺼 같은가?? 전혀!!!)

수학은 미흡한 개념부분을 정리하면서 수학 10-가, 나에서 수1과 관련된 부분이라고 오르비에 올라와 있던 부분만 개념원리 책을 찾아서 조금씩 봤다. 그리고 EBS 분권 문제집을 열심히 풀었다.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항상 끙끙대면서 내 힘으로 풀었다. 그런데 사실 내 머리의 한계를 뛰어넘는다고 생각되던 문제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런 문제들을 일주일 이상 생각해보고 정 안되었을 때는 그냥 아무 표시도 해두지 않고 넘어갔다. (이 중의 대부분이 삼수를 하면서 수학적 머리가 향상되면서 풀리기 되었다.) 하루에 5시간씩 정말 부지런히 내 머리로 공부를 하니까 수학적 머리가 조금씩 좋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학원이나 학교에서 그리고 과외 같은데서 선생님이 풀어주는 것은 선생님의 머리로 푸는 것이지 본인이 푸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기 바란다. 그런 환상적인 풀이를 보고 자신도 그렇게 될 꺼 같다는 \'착각\'은 금물)

외국어는 보고 있던 맨투맨 1권이 다 끝나는 시점이어서 맨투맨 2권을 보게 되었다. 맨투맨을 보면 볼수록 대단한 교재였는데 해설이 정말 자세히 달려 있어서 능히 혼자 공부할 수 있는 교재였다. 매 단원이 끝날 때마다 있는 영문독해 편도 너무 어렵지도 않고 너무 쉽지도 않은 적절한 난이도라서 독해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탐은 공부 방법을 가장 크게 바꾼 과목 중 하나였다. 9월 모의평가 문제들을 분석해보니까 국사의 경우에는 교과서에 있는 지문에 빈 칸을 내서 나오는 그런 너무나 지엽스러운 문제들이 많이 있었다. 지도나 그런 것들도 다 외워야 했다. 그 당시 6월 모의고사 문제도 풀어 봤는데 이 역시 생전 처음 본 것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당황해했다, 그래서 그것들이 다 어디에 있냐 살펴보니까,,, 바로,,, 국정교과서에 있었다,,,! 근현대사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다 교과서 안에서 나왔다,,, 옛날에 \'사탐은 교과서가 중요하다\' 라는 말을 얼핏 들었었는데 바로 지금이 교과서를 써야 될 시기가 아닌가 싶었다, 고등학교 때 썼던 국사 교과서 초판과 금성 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를 이후로 4회독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경제랑 사회문화는 지금처럼 기본서를 보면서 개념을 익히고 문제를 풀면서 나아가기로 했다.

제 2외국어를 시작해야만 했다,,, 고려대를 가려면 제 2외국어가 필수였다,,, 비록 고3 때는 다른 것을 하느라 하지를 못했지만 이번에는 독학으로 독서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10시간의 절대공부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할 수 있을 꺼 같았다, 오르비에 들어가서 제 2외국어에 한문 대한 정보를 살펴봤지만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면서 9월 모의평가 (물론 이 때는 제 2외국어 시험을 치지 않음) 유형을 살펴보았고 고등학교 떄 받은 한문교과서를 살펴보니까 대체적으로 교과서에 있는 지문들과 문장들이 많이 나온 것 같았다. 그런데 한문교과서는 설명이 너무나 부족해서 내 한문교과서 출판사인 교학사에서 만든 한문자습서를 사게 된다. 그리고 그 한문자습서는 내가 매일 점심과 저녁을 사먹을 때마다 계속 보게 된다. 한문자습서를 따로 시간을 할애해서 보기에는 너무 아까울 것 같았고 짜투리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었기 때문에 그러게 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하면서 여름방학 때 법대 공부를 위해서 한자공부를 많이 해둔 것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보니까 문장을 잘 몰라도 한자를 좀 많이 알면 통밥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상당 수 있었기 때문이다.

9월 모의평가를 치른 후 공부방법도 정비하고 대학생스러운(?) 생활도 완전히 정비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깐씩 했던 컴퓨터는 켜지 않았고 자기 전에 잠깐 보고 잤던 TV도 켜지 않았다. 모든 것을 공부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남은 시간은 2달 반, 늦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고3 때처럼 죽을힘을 다해서 공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밥 먹는 시간에는 한문 자습서를 보면서 공부를 했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가서 점심과 저녁을 먹자니까 집이 너무 멀어서 나는 가까운 시내 중앙에 가서 김밥천국과 김밥나라를 계속 다녔다. 그 곳에 가서 먹은 메뉴는 거의 다 김밥 2줄이나 찌개종류, 돌솥비빔밥, 돈까스 등 이었는데 그 중에서 김밥과 돌솥비빔밥을 너무나 즐겼다. 김밥과 돌솥비빔밥은 일단 내가 나물이나 야채를 따로 주면 잘 못 먹는데 잘게 썰어서 밥과 같이 비벼져 있으면 잘 먹는 스타일이라서 즐겨 먹었다. 또한 골고루 영양섭취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을 뿐만 아니라 맛도 일품이었다.

찌개 같은 경우에는 밥을 먹고 숟가락으로 국을 먹는 사이에 밥이 이미 씹혀서 빨리 소화가 되었는데 김밥과 돌솥비빔밥은 한 숟가락 먹고 나서 오물오물 하는 시간에 책을 계속 볼 수가 있었다. 간혹 책을 반으로 접어서 보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개의치 않았다. 졸업하고도 학교도 다시 다니는 나인데 그 정도쯤은,,,-0- 오히려 그렇게 사람이 적당히 있는 곳에서 책을 보니까 집중이 배가 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공부한 제 2외국어 결과는 뒤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 안드로메다

2005년 9월 28일, 대성 모의고사를 치르게 된다.


▲ 9월 28일 대성 모의고사 결과,,, 이 때 언어가 쉽게 나와서 다들 언어를 잘 봐서 88점이라는 점수가 크게 빛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확실한 것은 나의 언어실력이 독서를 통해서 늘고 있다는 점이었다. 외국어도 맨투맨을 보고 EBS 수능특강을 풀면서 실력이 향상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수학은,,,ㅠㅠ

시험 결과는 참담했다,,, 언어랑 외국에서 선전하여서 기뻤지만 수학이 53점을 받았다,,, 언수외 230점,,, 9월 모의평가 때는 언수외가 236점이었다,,, 고려대 법대를 가려면 필요한 언수외 290점대에 60여점이 모자랐다,,, 1학기 때 학원을 다니다가 2학기 때 내려온 친구가 96점을 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 친구는 현역 때도 이미 수학 하나는 끝내주는 친구였는데 이제 수학이 완성단계인 듯싶었다,,,

내가 틀린 문제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도저히 내 머리로 풀 수 없는 것들이 많아 보였다,,, 좀더 조건을 찾고 분석해보면 풀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내 머리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문제들을 보고 나는 내 머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탐은 열심히 했는데 역시 경제가 말썽이었다, 다시 작년 9월 대성 경제 6등급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열심히 했는데 도저히 문제를 풀면 잘 풀리지 않았다, (삼수까지 한 지금에야 알았지만 나의 머리는 경제적 마인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수능 가서는 이상하게 선전하니,,, ㅡㅡ;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것을 경제를 풀면서 또 실감했다.) 국사랑 근현대사는 교과서를 꾸준히 정독하는 것이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근현대사에서 역시나 좀 지엽적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정독을 통해서 1등급을 받은 것이 기분이 좋았다.

좌절은 있지만 포기는 없다,,, 아직 나의 공부가 여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공부 방법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 동안의 모든 시행착오를 담아서 최종적으로 완성한 공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나의 머리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10월 교육청 모의고사를 치게 된다,,,


▲ 2005년 10월 서울시 교육청 모의고사 결과, 이 때 외국어 1등급 컷이 83점을 정도로 매우 어려웠었다, 그리고 언어가 이뭐병이 되었다,,, 단순히 그날 컨디션으로 치부하기에는 뭔가 좀 그랬지만 삼수를 해서 이때의 문제를 풀어보니까 나의 뇌랑 정말 코드가 맞지 않는 문제들만 나온 거 같았다,,,-0-

언수외를 또 236점을 받고 말았다,,, 아직도 60여점이 부족했다,,, 수학은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84점을 받아서 기분이 너무 좋았는데 1등급 컷이 85점임을 알고 아쉬웠다,,,ㅠㅠ 수학 1등급 받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언어랑 외국어는 안드로메다로 가버렸다,, 외국어는 풀 때부터 어렵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는데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 나머지 많이 휘둘린 거 같았다,,, 물론 그것은 나의 실력이기도 했고 말이다. 사탐은 나름대로 선방했다고 생각했으나 역시 경제가 문제였다. 또 30점대를 맞았다,,, 참 해도 해도 안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경제를 통해서 또 한 번 느꼈었다,,,

이때의 시험을 치고 이 점수로 경희대 법대도 갈 수 없다는 사실에 너무 암울해 했다,,, 언수외 236점으로 도대체 어디를 갈지,,, 고려대 법대를 가기 위해 필요한 언수외 290점대는 커녕,,, 다시 경희대 법대를 갈수조차 없을 꺼 같아서 너무 괴로웠다,,, 계속 연이은 안드로메다행,,, 내가 비록 체력적인 면이 떨어져서 늦게 일어나서 도서관에는 10시에 도착하고 그렇지만 하루에 순수하게 10시간이 넘는 절대시간을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성적이 잘 오르지 않으니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늦게 시작을 해서 아직 시동이 안 걸려서 그렇다고 믿고,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공부를 계속 해 나갔다,,,

10월 말에 중앙 모의고사를 한 번 치게 되는데 이때의 성적표는 전산처리를 하지 않았다, 일기에도 그냥 개박살났다고만 되어있는데 아마 3학년때 보다 더 못한 350점대를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오르기는커녕 갑자기 너무나도 급격하게 떨어진 언수외와 사탐,,,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그 때 친 국사시험인데 진짜 지도도 희한하게 경계 같은 것을 에매하게 표시해놔서 구분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9월 모의평가 국사를 본떠서 만든 것임이 한 눈에 드러났었는데 9월 모의평가보다 더 지엽적이고 변두리에 있던 내용들이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27점을 받은 것으로 아직도 그 기억은 잊혀지지 않고 있다. 시험을 완전 망치고 정말 할 말이 없었던 것이 생생하다,,, 그 때 수학점수는 40점대로 기억한다,,, 도대체가 사설 모의고사 수학은 나의 머리로는 도저히 감당을 할 수가 없었다,,, 같이 망한 친구들과 3학년 지도실이 있는 쪽이 아닌 왼쪽 계단을 통해서 가채점표를 제출하지 않고 학교를 도망나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중앙 모의고사를 친 주에 토요일 날 학교 열람실에 와서 쓴 일기, 너무나 괴로웠다,,, 이 때는 고려대 법대는커녕 다시 경희대 법대를 갈 수 있는 성적이 나와 줘도 감사한 그런 심정이었다,,, \'하루 종일 공부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이라는 표현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그건 내가 잠을 불면증과 안 좋은 몸 때문에 8시간 이상씩 자는 것 때문에 아침시간에 2시간 정도 밖에 공부를 못해서 쓴 표현이다. 그래도 하루에 독서시간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하루 10시간 정도는 계속 하였다.

■ 11월의 飛上

11월은 나랑 인연이 깊은 달이다,,, 이때만 되면 이상하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만들어내곤 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나의 능력이 11월만 폭발하는 그런 희한한 사주가 있지 않나 싶다,,, 11월 1일, 작년에 나에게 450점의 뽀록을 안겨 주었던 운명적인 종로 모의고사를 치게 된다,,, 왠지 그날따라 기분이 너무 좋고 1년 전처럼 대박이 날 꺼 같은 느낌이 문제를 풀면서 느껴졌다,,,


▲ 11월 달은 작년처럼 학교에서 성적표를 전산처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적표는 없고 다만 그 날의 기쁨은 이렇게 나의 가슴 속과 머릿속과 그리고 일기 속에 담겨 있다.

너무나 기뻤다,,, 정말 날아갈 것만 같았다,,, 특히 언어가 89점이었고 수학이 80점대를 넘겼으며 외국어는 대박이 나서 97점을 받았다,,,!! 듣기를 다 맞아서 특히 기분이 좋았는데 3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듣기를 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꺼 같은 자신감이 마구 샘솟았다,,, 물론 11월 모의고사들은 수능을 앞 둔 수험생에게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서 쉽게 나오기는 했지만 (특히 사탐) 이런 점수도 나에게만 마냥 행복했고 즐거웠다,,,

맨투맨을 2권까지 다 보고 파사쥬 외국어 영역 어휘/어법 모의고사를 풀고 다시 복습하는 과정을 통해서 문법에 대한 감각이 엄청나게 향상되었다. 외국어 영역 문법은 보는 순간 수학문제처럼 딱 감이 와야 하는데 바로 그런 감이 나에게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보카를 3번 정도 반복해서 봄으로서 어휘문제도 많이 극복이 되었다.

11월 8일, 수능을 보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성 모의고사를 쳤다.


▲ 2005년 11월 8일 마지막 대성모의고사를 치루었다, 시험이 쉽다고는 못 느꼈는데 현역 얘들 중에서 평소보다 점수가 많이 오른 후배들이 많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의 점수는 447점이었는데 나에게는 너무나 감지덕지인 점수였다. 하지만 이 점수는 그만큼 내가 노력해서 받은 점수였기 때문에 더욱더 기뻤다,,,

마지막 모의고사를 치루고 나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10월 달까지의 좌절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드디어 연달아 대박이 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은 평생 살면서 자신의 뇌의 2%만 쓴다고 하는데 이 시기에 나는 10%를 넘게 쓴 느낌이 들었다,,,) 물론 고려대 법대는 역시 무리인 점수였지만 수능은 사설과 달리 정말 명쾌한 문제들 밖에 없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시험에 임하고 운까지 더해준다면 고려대 법대도 왠지 되지 않을까 싶은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11월 22일,,, 수능 시험을 하루 앞 둔 날이 찾아왔다,,,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르기만 한 것인지,,,  친구들과 예비소집 장소에 가서 수험표를 교부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1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르비질을 좀 하였다,,, 다들 설레고 긴장되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저녁을 먹고 학교에 가서 마음의 정리를 하고 1년 전과 마찬가지로 일기를 썼다,,


▲ 06 수능을 하루 앞두고 저녁에 학교 열람실에 와서 쓴 일기

1년 전과 마찬가지로 수위 아저씨께 인사를 드리고 또 격려를 받고 그렇게 학교를 나섰다,,, 학교를 나가면서 1년 전처럼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때와 다를 것 없이 하늘에는 반짝반짝 별이 빛나고 있었다,,, 실수를 하지 않고 아는 것만 다 맞고 운까지 따라준다면 고려대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11월의 연속 대박을 통해서 자신감이 넘쳤다,,, 다 풀 수 있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하늘을 향해서 크게 숨을 들여 마시고 내쉬고는 힘찬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갔다. 그리고 그 날 집에 가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잠을 잤다,,, 그리고 일어난 날은 바로 11월 23일 수능 시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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