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엽신 [439425] · MS 2018 · 쪽지

2014-11-20 17: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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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비 문학 새작품 - 태평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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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서 전보가 왔는데요……."


지체를 바꾸어 윤주사를 점잖고 너그러운 아버지로, 윤직원 영감을 속 사납고 경망스런 어린 아들로 둘러 놓았으면 꼬옥 맞겠습니다.


"동경서? 전보?"


"종학이놈이 +1수를 한다구요?"


"으엉?"


외치는 소리도 컸거니와 엉덩이를 꿍― 찧는 바람에, 하마 방구들이 내려앉을 뻔했습니다. 모여 선 온 식구가 제가끔 정도에 따라 제각기 놀란 것은 물론이구요.


윤직원 영감은 마치 묵직한 몽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양, 정신이 멍―해서 입을 벌리고 눈만 휘둥그랬지, 한동안 말을 못 하고 꼼짝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이윽고 으르렁거리면서 잔뜩 쪼글트리고 앉습니다.


"거, 웬 소리냐? 으응? 으응……? 거 웬 소리여? 으응? 으응?"


"그놈 동무가 꼬드겼나 본데, 전보가 돼서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윤주사는 조끼 호주머니에서 간밤의 그 전보를 꺼내어 부친한테 올립니다. 윤직원 영감은 채듯 전보를 받아 쓰윽 들여다보더니 커다랗게 읽습니다. 물론 원문은 일문이니까 몰라 보고, 윤주사네 서사 민서방이 번역한 그대로지요.


"종학, 물수능으로 재종반에 입학……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다냐?"


"종학이가 물수능으로 재종반에 붙잽혔다는 뜻일 테지요!"


"물수능이라니?"


"그놈이 +1수에 참예를……."


"으엉?"


아까보다 더 크게 외치면서 벌떡 뒤로 나동그라질 뻔하다가 겨우 몸을 가눕니다.


윤직원 영감은 먼저에는 몽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같이 멍했지만, 이번에는 앉아 있는 땅이 지함을 해서 수천 길 밑으로 꺼져 내려가는 듯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단코 자기가 믿고 사랑하고 하는 종학이의 신상을 여겨서가 아닙니다.


윤직원 영감은 시방 종학이가 +1수를 한다는 그 한 가지 사실이 진실로 옛날의 드세던 부랑당패가 백길 천길로 침노하는 그것보다도 더 분하고, 물론 무서웠던 것입니다.


진(秦)나라를 망할 자 호(胡:오랑캐)라는 예언을 듣고서 변방을 막으려 만리장성을 쌓던 진시황, 그는, 진나라를 망한 자 호가 아니요, 그의 자식 호해(胡亥)임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죽었으니, 오히려 행복이라 하겠습니다.



"+1수라니? 으응? 으응?"


윤직원 영감은 사뭇 사람을 아무나 하나 잡아먹을 듯 집이 떠나게 큰 소리로 포효(咆哮)를 합니다.


"……으응? 그놈이 +1수를 허다니! 으응? 그게, 참말이냐? 참말이여?"


"허긴 그놈이 작년 여름방학에 6평 성적표 나왔을 때버틈 그런 기미가 좀 뵈긴 했어요!"


"그러머넌 참말이구나! 그러머넌 참말이여, 으응!"


윤직원 영감은 이마로, 얼굴로 땀이 방울방울 배어 오릅니다.


"……그런 쳐죽일 놈이, 깎어 죽여두 아깝잖을 놈이! 그놈이 점수 맞춰 입학 허라닝개루, 생판 쳐놀다가 뎁다 재종반에 잽혀? 으응……? 오―사 육시를 헐 놈이, 그놈이 그게 어디 당헌 것이라구 지가 +1수를 히여? 부자놈의 자식이 무엇이 대껴서 부랑당패에 들어?"


아무도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섰기 아니면 앉았을 뿐, 윤직원 영감이 잠깐 말을 그치자 방 안은 물을 친 듯이 조용합니다.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오죽이나……."


윤직원 영감은 팔을 부르걷은 주먹으로 방바닥을 땅― 치면서 성난 황소가 영각을 하듯 고함을 지릅니다.



"학벌주의가 있더냐아? 아님 공부가 어렵더냐……? 공부를 해봐야 점수는 안나오고, 탐구가 4과목이던 말세넌 다 지내가고오…… 자 부아라, 거리거리 대학생이요, 골골마다 공명헌 원서질,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명 물수능을 치게 혀서, 우리 조선 학생 보호히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 점수 지니고 앉아서 편안허게 입학할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그런디 이런 태평천하에 태어난 부자놈의 자식이, 더군다나 왜 지가 떵떵거리구 편안허게 살 것이지, 어찌서 지가 세상 망쳐 놀 부랑당패에 참섭을 헌담 말이여, 으응? 지가 몽주니어여 으응? "



땅― 방바닥을 치면서 벌떡 일어섭니다. 그 몸짓이 어떻게도 요란스럽고 괄괄한지, 방금 발광이 되는가 싶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모여 선 가권들은 방바닥 치는 소리에도 놀랐지만, 이 어른이 혹시 상성이 되지나 않는가 하는 의구의 빛이 눈에 나타남을 가리지 못합니다.


"……착착 깎어 죽일 놈……! 그놈을 내가 핀지히여서, 백 년 지녁을 살리라구 헐걸! 백 년 지녁 살리라구 헐 테여…… 오냐, 그놈을 삼천 석거리는 직분〔分財〕하여 줄라구 히였더니, 오―냐, 그놈 삼천 석거리를 톡톡 팔어서, 기숙학원으다가 답없는 놈 잡어 가두는 기숙학원으다가 주어 버릴걸! 으응, 죽일 놈!"


마지막의 으응 죽일 놈 소리는 차라리 울음 소리에 가깝습니다.


"……이 태평천하에! 이 태평천하에……."


쿵쿵 발을 구르면서 마루로 나가고, 꿇어앉았던 윤주사와 종수도 따라 일어섭니다.


"……그놈이, 만석꾼의 집 자식이, 세상 망쳐 놀 N수생 부랑당패에, 참섭을 히여. 으응, 죽일 놈! 죽일 놈!"


연해 부르짖는 죽일 놈 소리가 차차로 사랑께로 멀리 사라집니다. 그러나 몹시 사나운 그 포효가 뒤에 처져 있는 가권들의 귀에는 어쩐지 암담한 여운이 스며들어, 가뜩이나 어둔 얼굴들을 면면상고, 말할 바를 잊고, 몸둘 곳을 둘러보게 합니다. 마치 장수의 죽음을 만난 군졸들처럼……

여름에 떠올랐던 아이디어를 이제야 쓰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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