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양은 자기위안과 양립할 수 있을까(있다)
게시글 주소: https://a.orbi.kr/00069037758
안녕하세요 독서 칼럼 쓰는 타르코프스키입니다
곱씹어볼수록 흥미로운 논쟁이라서 의견을 남겨보려고 합니다.
일단 저는 이런 고민이 현장에서 불가능하므로 쓸모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실제 수능 기출에도 선지가 반드시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는다는 점을 직접 느껴보는 건 필수적입니다.
논란의 쟁점이 많지만, 핵심 질문은 <겸양이 자기위안과 양립할 수 있는가>입니다.
결론은 양립할 수 있다. 그리고 화암구곡에서 겸양의 태도가 드러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허용 가능)
"겸양은 단순히 낮추는 말이기 때문에 실제 낮은 처지에서 비하적인 표현을 쓰더라도 겸양이 될 수 있다"
"겸양은 실제로는 높은데 표현만 낮춰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낮은 처지에서 비하적인 표현을 쓰는 것은 겸양이 될 수 없다"
제가 보기에 두 견해에는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자기 위안'과 '자기 비하(자포자기)'는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인간으로 태어나서 친구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나는 쓰레기다. 이대로 비참하게 살다가 죽겠지"라는 표현에서 겸양의 태도가 드러난다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지만 화암구곡의 화자는 자기를 비하한다기 보다는 자기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회포뿐만 아니라 자족감과 긍지까지 동시에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묘한 심리 때문에 선지 판단이 어려워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유행하는 말로 '오히려 좋아', '럭키비키', '정신승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비슷한 이중적 감정을 느껴본 적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문학, 심리학 등에서 활용되는 '조하리의 창'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나와 타인이 평가하는 나와, 타인이 알지 못하지만 나만 아는 내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겸양이라는 개념이 필연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든 높고 낮음 사이의 격차를 전제하는 태도라는 점은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암구곡에서 화자는 내면에 있어서 언젠가 출사에 성공할 것이라고 진심으로 느끼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남들이 그를 어떻게 보든지 간에, 이미 야인 생애로 손가락질과 비난을 받고 있더라도, 정신승리를 시전하고 있는 화자 스스로는 여전히 겸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랑스러움은 틀린 걸까요? 자랑스러움은 자족감과 긍지와 다른 것일까요? 매우 애매합니다. 자신감과 자존감, 자부심, 자족감, 자긍심이 미묘하게 유사하면서도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참고로 2025학년도 LEET 추리논증 27번에서, '동정심'과 '미안한 마음'이 같은 것인지, 혹은 최소한 유사한 것인지에 관해 출제 오류 논란이 있었으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결론적으로 출제기관은 둘은 거의 동일한 것으로 판단함).
긍지(=자신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가지는 당당함)와 자랑스러움(=남에게 드러내어 뽐낼 만한 데가 있다)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수험생은 이러한 차이를 잘 인식해야 합니다. 떄로는 비슷한 거니 퉁치고 넘어가되, 때로는 예리하게 구분해낼 줄 알아야 합니다. 화암구곡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자랑스러움'의 감정이 드러났느냐? 라고 묻는다면 결국 1수에서의 긍지가 자랑스러움과 동치될 수 있는지의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보기>와 1수만 보면, 화훼에 대한 긍지가 자랑스러움으로 확장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이 자랑스러움이 단순한 내적인 기쁨에 머무는지, 아니면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은 감정인지는 1수만 봐서는 명확히 구별하기 어렵습니다만, 어느 경우이든 긍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산에서의 삶"(9수)에서 자랑스러움을 느끼냐고 한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화훼에서 긍지를 느끼는 것과, 청산에서의 삶에서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것 사이에는 두 가지 간극이 있습니다. 하나는 긍지와 자랑스러움 사이에 있고, 다른 하나는 '화훼를 가꾼 행위'와 '청산에서의 삶' 사이에 있습니다. 화훼를 가꾼 행위가 청산에서의 삶에 포함되는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청산에서의 삶을 종합적으로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9수에 나오는 '자랑'은 명백히 대외적인 자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지금은 대외적으로 자랑할 수 없지만 미래에만 자랑할 수 있다고 여길까요? 그건 명확히 드러나있지 않지만 추측컨대, 나중에는 출사에 성공해서 무용담처럼 자랑할 수 있겠다 정도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제가 중요합니다. 여자친구를 사랑하십니까? 누군가 굳이 "사랑했죠", "사랑할 날 있겠죠"라고 답한다면 당연히 현재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반대해석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오묘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만든 화훼에 긍지를 느끼는 건 맞지만, '야인 생애'(청산에서의 삶)라는 말이 현재의 자랑스러움을 표현한다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자랑스러움과 겸양은 논리적으로 불일치하기 때문에 절대로 답이 될 수 없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내적인 자부심을 외적인 비하표현으로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기 떄문입니다. 여기서 4번 선지가 틀린 이유는, 화자가 청산에서의 삶 자체를 현재로서는 외부에 자랑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는 9수에서 더 강하게 드러납니다. 결국 1수, 6수, 9수를 종합해 보면, 화훼에 대해 이미 느끼는 감정은 긍지(자랑스러움)이 맞지만 이는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고, 특정 부분에 한정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대외적으로 자랑하고 싶은 포인트는 야인 생애, 즉 힘든 시기를 겪었다는 것인데, 이는 야인으로서는 결코 자랑할만한 것이 아니고, 먼 훗날에 비로소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가수 지망생이 군대에 갔는데 운이 나빠서 최전방에 끌려간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자발적으로 끌려간 게 아니고, 가수로서 무대에 설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과 회포를 분명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군대에서 축구를 하다가 골을 넣으면 자족과 긍지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군바리'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여전히 겸양의 태도가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힘든 군생활을 겪었고 그 중에 골도 많이 넣었다는 사실을 언젠가 자랑할 일이 있을거라며 자기 위안을 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장 멍석을 깔아주고 남들에게 자랑해보라고 하면 자랑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 자랑은, 자기가 가수로 성공하고 나서, "하하 제가 이런 어려운 시기도 다 겪어봤습니다"라고 하면서 비로소 자랑할 성질의 것이고, 지금 당장 떠벌리기에는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너무 하찮은 것이라고 스스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골은 분명 긍지를 느끼는 원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대에서의 삶'에서 자랑스러움을 느낀다고 표현하는 것은 비약이 될 것입니다. paraphrase에서 중요한 것은, 부분과 전체, 개연과 필연 등을 착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골 넣는게 기쁘니까, 앞으로도 군대에 계속 있을래?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화암구곡에 나오는 정서는 소년점프라는 노래에 "계획대로 되고 있어"라는 가사에서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현실에 대해서는 종합적으로 부정적인 태도이지만, 그 중 일부에 대해서는 오히려 좋고, 현재로서 긍지를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래에는 반드시 탈출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탈출한 후에는 그 부정적인 현실이 오히려 남들에게도 자랑할 만한 것이 되는 역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훼에서 긍지를 느끼는 것과 청산에서의 삶에 회포를 느끼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양립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모국어화자이지만 이 문제를 자세히 보기 전에는 긍지와 자랑스러움 사이에 미묘한 차이를 명확히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학습에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p.s. 위와 비슷한 사례로, "재능"이라는 어휘에 대한 오개념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흔히 재능 vs. 노력이라는 식으로 표현되어서 마치 재능이 선천적인 소질만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지만, 실제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재능은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주와 능력. 개인이 타고난 능력과 훈련에 의하여 획득된 능력을 아울러 이른다."라고 정의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평가원에서 이런 부분을 출제 아이디어로 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노베 기적일지 D-62 “고난의 시기에 동요하지 않는 것, 이것은 진정 칭찬받을...
-
9평은 28틀 96이고 강x는 매주 푸는데 88~84 진동하는 수준입니다 지금...
-
국어 0
영수탐은 하면 할수록 오르는게 느껴지는데 국어는 왜 변함이 없을까요
-
국어 기출분석 3
한 지문 풀고 선지 하나하나 정답 근거 찾아내고 주로 어떤 문장의 형태가 문제화...
-
어느정돈가요? 설맞이나 드릴과 비교
-
두고두고 놀려먹어야지
-
논술 다들 많이쓰네 현역분들아 님들 주변에도 가천대 노리는 사람 많음?
-
숭실대논술 3
14:1 요정도 대고 최저 2합5면 실질경쟁률 어느정두대나요?????
-
배송포장을 그지같이함;; 내가 우리 동네 택배 파손이 잦다고 택배사에 전화해봐도...
-
아 진짜 바본가 0
성대 인문논술 도표문제 없는줄 알고 원서넣음 작년에 건대 준비할때 도표 잘못했는데...
-
난 개인적으로 투표권이 제한적으로 부여되어야 한다고 봄 17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일단 국민이 의사 결정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여론의...
-
시즌 몇부터 파이널인거져? 실모 이제 시작이라 모르겟어요..
-
고1 영어 0
조정식 괜찮아 문장편 끝나면 바로 믿어봐로 넘어감?
-
성적이 좋을진 의문이지만.. 어차피 재수강만 면하면 되는거잖아? 나중에 영강도 이...
-
내신이 박살남->정시에 영향 자존감이 떨어짐 수시챙겨도 등급 애매해서 거의 정시로...
-
엔제처럼 시간 안재고 풀어도 되나요..? 공통만 뽑아서 풀고 있어요 아니면 잴까요?
-
천만덕
-
맞팔 구해요 5
맞팔 하실분 안계실까요!
-
전공에서 배운 내용 오늘 푼 국어지문에 나오길래 자신있게 풀고나니 2문제 틀림 역시...
-
올오카 아수라 1
올오카 아직 다 못끝냈는데 최대란 끝내고 아수라 오는대로 해도 될까요? 독서 3강...
-
맞팔구!! 27
오랜만에 맞팔구합니다~! 흔하게 오는 기회가 아니여유 ㅎㅎ
-
6모 이후에 수학 공부 별 안해서 9모 88점 나왔고 요즘 감이 좀 떨어진 것...
-
오늘 과외수업 잘 마무리되어 기분이 좋아서 감사합니다 내일부터는 더 열심히...
-
오늘 현장응시했는데 44점 나옴ㅋㅋ 원래10분이상 남기는 편인데 피곤해서 그런건지...
-
정상임? 2회 30점 달성 ㅅㅂㅋㅋㅋㅋ 6모 47점 9모 41점입니다.. 사설보다 사설틱한데ㅜ
-
수학뭐하죠 2
기출은돌렸는데 n제는어려운..
-
맞팔하실분 9
없나요
-
그리고 무좀은 감염성 질병이며 병원체는 곰팡이고 다세포진핵생물이므로 핵막을 가지며 치료제는 항진균제
-
현대시 감상 2
1번째 사진은 현대시를 연마다 끊어서 상황과 정서를 파악하는 모습인데, 2번째...
-
사문질문 4
2번에 달리가 아니라 비해라고 해야 맞는건가요?
-
국숭 이상으로 궁금합니다... 1순위 상경 → 2순위 사과대 정도 고려중입니다 사탐...
-
국어 상상 3-4 79: 2컷… 언매 틀림 문학에 35분 쓰고;; 독서 한 지문...
-
수학4 통통이 기출 한번도 안돌렸는데 몇개년 해야하나요?ㅠㅠ 3받고 싶어요ㅠㅠㅠ
-
교보문고에 출현 예정 어딘지는 흠..
-
점수 확확오르다가 떨어지시면 꼭 4공법으로 돌아가시길 바랄게요,, 제 생각...
-
ㅠㅠㅜㅜ
-
의외로 수능 고득점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 놈..ㄹㅇ 14
초등 고학년 ~ 고1 때의 공부량 저거 수험기간 1~2년만에 따라잡기 힘든 듯....
-
1컷 45 위로는 못가게 낼꺼 같음... 9모 보니까 시동 거는거 같아서 두려움
-
난 오르비할 자격이 충분하다
-
?
-
5차 vs 7차 0
-
흠냐
-
저도 연휴를 즐기고 싶어요,, 슬프네요
-
지금 기억 그대로 3월로 돌려보내준다고 하면 가실건가요? 16
일단 전 못감,,, 언제 끝나 크아아ㅏㄱ
-
개쩌는 릿밋딧 0
풀어보고 개쩐다 싶었던 릿밋딧 지문 있으신가요..?
-
30년까지 축제 없어서 마지막 축제일텐데 하하,10cm,지코...
-
팔로우 해쭈때요 5
저도 맞팔해드릴께용 뿌잉뿌잉
-
혹시 지진때문에 수능 연기된 날을 직접 체험하셨던분 계신가요?… 13
무슨 느낌이셨을지,,
-
금연 12일차 5
힘들어요
-
쇼라이노 유메
첫번째 댓글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