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서랑 [648028] · MS 2016 · 쪽지

2016-03-15 23: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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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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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후의 이야기

 

 나는 퇴원을 했고, 집에 와서는 열과성을 다해 잠을 잤다. 체력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삶의 1순위가 꿀잠이었고, 밤에도 낮에도 곯아떨어지고, 밥도 마다하고 숙면을 취했다.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나에게 남자친구는 없다. 그렇기에 뭔가 쎄 하게 심심했다. 그리하여 마음 맞는 3명의 여자들이 모였다. (전부 애인이 없다는 뜻임) 그날 술을 먹어보고 싶었는데 5일이 모자라서 못 먹었다. 우리는 밥 대신 파전을 먹고, 망고 식스에 가서 수다를 떨고, 노래방에 갔다.

 

 우리 아빠는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언제나 생각하라고 하셨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러나 이건 100% 확신한다. 노래방에 여자끼리만 가지 않고, 뭔가 어색하지만 친해지는 과정의 남자애 하나만 있었어도 이런 사단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첫 곡으로 임재범의 를 불렀다. 안 올라가는 고음을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극복했다. 처음으로 선곡한 게 저 정도의 스케일이면 뒤에 물이 올랐을 때 부른 챔피언과 낭만 고양이 등이 얼마나 기똥찼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나는 노래방에서 다소곳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이후로 배꼽이 터졌으니까.... 터졌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수술한 부위가 진물이 나고 그랬다. 규진이 이모가 보시고 병원에 전화 해 보라고 하셨다. 그러다 괜찮아 지는 가 싶더니, 급격하게 배꼽 전체에 시커먼 무언가로 덮였다.

 

 그래서 부산대학교병원에 다시 가게 되었다. 교수님이 배꼽을 보시더니 “어 배꼽이 왜 이래?” 라고 말씀 하시며, 복압이 오르는 (예를 들면 노래 부르기) 행동을 하면 그럴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매일매일 소독을 하러 오라고 하셨다. 이게 표면적으로 보면 번거로울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는 병원을 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집에서 신분이 상승했다. 그냥 왕족이 되었다. 원래는 무수리라서 매일 청소하고 물건 정리하고 무거운 것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로 수술한 애한테 뭐든지 금지, 절대 안정 필요! 가 되었다.

 

 교수님은 수영복을 입을 때 혹시나 흉이 나쁘게 지면 안 된다고 신경을 써 주셨다. 소독하고 항생제를 그 위에 뿌리고 배꼽을 모아서 고정시켰다. 그렇게 하면 예쁘게 낫는다고 하시면서, 복대를 하고 있으면 도움 된다고 하셨다.

 

 1주일 정도 병원에 갔다. 병원에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이 대부분이라, 노래방에서 실컷 놀다가 배꼽이 덧난다거나... 자고 일어났더니 배꼽에 붙여둔 거즈가 다 사라졌다고 하는 환자는 드물었던 가 보다. 거즈가 없어진 이유를 말씀 드렸는데 밖에 있던 여자 선생님이 빵 터지셨다. 도대체 어떻게 잤냐고.ㅎ

 

 교수님은 20살 여자애의 수영복 입을 일을 걱정하실 만큼 인류애가 넘치는 분이셨다.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 내가 앞으로 뭐 하고 싶은지를 물어보셨다. 그렇게 병원에 왔다 갔다 하는 시기에 대입 결과는 나왔고, 교수님이 궁금해 하시기에 “제 과거를 세탁하기 위해 재수해요.” 라고 말씀드렸다. 정말이지 살면 살수록 반성할 일이 많다. 그 소식에 교수님은 억지로 공부하지 말고 할 때 즐겁게 재미있게 공부하라고 하셨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노력에 가속에 가속이 붙었다. 내가 스트레스 받아서 혹 생긴 것 같다고 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다.

 

 진로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내가 사기꾼에 대해 언급했었다.(두 주제가 연관 없어 보이지만 맥락이 있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세상에 완벽히 좋은 사람은 없고, 무조건 나쁜 사람도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중요한 건 나쁜 사람에게도 배우고, 괜찮은 사람에게는 본받는 것이다. (또는 부정적인 면을 인식하거나) 나는 배꼽을 보여드리면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어떤 사람이 자기 틀이 강하면 불편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틀이라는 건, 사람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한 잣대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주로 갈등은 이런 데서 나타나는 것 같다. 내가 저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저런 행동이 불편하다고 규정해 버리면 내 감정부터 나빠진다. 그런다고 내가 밖으로 행동하지는 않지만(참음) 다 티가 난다. 그럼 서로가 적대시 하게 되는데, 이게 충돌의 출발점이 된다. 그래서 그럴 수 있다고 타인에 대해 아무런 가치판단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었다. 그런데 살다보면 그런 노력이 무색해 지는 순간이 있더라. 그냥 내 본능이 ‘저 사람 나빠... 나를 힘들게 해...’ 라고 판단해버리곤 했다. 말하자면 진상을 맞닥뜨릴 때이다. 그런 상황을 겪다 보면 긍정적으로 상황을 마주하려는 내 가치관도 와르르 무너진다.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2가지가(타인을 내 기준에서 판단하지 않는 것과, 긍정적으로 생활하는 것) 한꺼번에 파괴되는 거라.. 스스로가 미워진다. 이런 순간에, 이제는 겸허하게 ‘배우는 거다’, 라는 자세로 들어가면 되겠다. 모든 사람은 나의 스승이다. 이런 선비 같은 자세를 견지하면 순간의 딥빡(깊은 화남!)이 잘 다스려질 것 같다. 그리고 별 다른 감정의 기복 없이 내가 지향하는 자세로 돌아올 수 있다.

 

 내가 대기실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걸 본 교수님이 폭풍 칭찬을 해주셨다. >_< 우리 집에서는 내가 공부하는 걸 자기 일을 스스로 하는 당연한 인간정도로 밖에 평가를 안 해 주는데, 이런 반응은 사뭇 색달랐다. 그래서 그런가. 그때 짜증나게 생긴 단어를 외우고 있었는데 아직까지 기억난다. [insomnia-불면증(한국어로 불면증을 일 년에 한 3번 쓸까?_, resuscitation-소생법, 뉴모니아-폐렴 스펠링이 기억 안남 infiltration-침윤(염증이 침입하는 거라, 내 배꼽을 연상하며 외웠다.) 등등 고유명사와 새로운 단어가 많아서 좀 까다로웠다.] 그리고 내가 글 쓰는 걸 재미있어 한다고 말씀드리며 블로그 알려드렸다. 굉장히 즐거워하시며 바로 들어가 보셨다. 앞으로도 심심하면 놀러오겠다고 하시더라.^^ 의사 선생님 환자가 다 잘 나아서 내 블로그를 방문할 여유가 생겼으면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블로그 만드는 법을 물어보셨는데, 교수님 같은 아저씨가 블로그를 하면 흥미로운 블로그가 될 것 같다. 하셨으면 좋겠다. :)

 

 병원에 다니며 염증은 다 사라졌는데, 물집이 생겨서 터트렸다. 흠좀무한 상황이었지만, 딱히 아픈 건 아니었다. 바늘이 나를 찌른다는 공포감이 컸다. 그렇게 병원을 다니며 배꼽은 점점 회복되어갔다. 보면 볼수록 복강경 수술이 신기했다. 내 배를 보면 큰 혹을 꺼낸 수술을 한 것 같지 않다. 수술이라 하면 날카로운 수술자국이 연상되는데 그런 게 없기 때문이다. 배꼽 색이 상처 난 것 같은데, 이건 점차 없어진다고 한다. 그냥 평범한 배다. 그래서 엄마에게 대단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었다.

 

 얼마 전에 테디 의사선생님이 전문의가 되었다는 글을 블로그에 올리셨다. 그 마지막에 자기를 사람으로 만들어 준 성형외과 의국에 감사하다고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원래 사람이었는데 잠시 다른 탈을 썼겠지, 병원에서 어떻게 사람을 만들지?’ 싶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의사선생님들을 보니, 진짜 옆에 있으면 사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내가 아는 의사쌤들은 병원에서 혹사당한 경험만 말해서 이런 곳인 줄 몰랐다.) 다들 정말 좋으신 분들이었다. :) +마취과 이모 

 

 병원에서 소독해 주시던 선생님이 주말에는 집에서 소독하라고 이것저것 챙겨주시고(잘 숨겨서 가라며 주섬주섬 주셨다.), 잘 해주셨다. 그 이야기를 듣던 엄마가 다음에 보면 장가갔냐고 물어보라고 했다. 소개팅을 시켜줄까? 하시더라. 그래서 선생님께 여쭈어보았더니 선생님이 얼굴이 빨개지면서 크게 웃었다. 장가는 안 갔는데 시간이 없어서 안 될 것 같다고 하셨다. 청춘이 연애할 시간이 없는 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인 것 같다. ㅠㅠㅠ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며 느낀 점도 하나씩 쌓여갔다. 내 친구 남동생은 나보고 “누나 배꼽 터졌다매? 그러면 큭큭 배꼽 3개 되나?” 하며 신기한 사람을 만난 듯 즐거워했다. (여러분 애가 작년에 제 배를 공기빵 같다고 놀린 동생입니다. 친구랑 간식 먹을 때마다 그만 좀 먹으라고 배나온 걸 구박했죠. 정말 심각하게 뭐라 했었음..) 아빠는 나보고 “너는 조선시대 태어났으면 죽었다.” 는 진지한 성찰의 결과를 알려주셨다. 나는 ‘헉 플러스알파 인생이네,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래서 이 혹을 발견해 주신 한의사 선생님께 감사의 편지를 보냈고, 수술을 잘 해주시고 여러 편의를 봐주신 서동수 교수님과 마취과 교수님께(하트)도 편지를 적었다.

 

 그리고 수술한 사건을 글로 적었다. 블로그랑 오르비에 올렸다. 오르비에 게시하기 전에 두근두근 거렸는데, 사람들이 별로 안 보셨다. 그래서 ‘아 묻혀가는구나.’ 하고 뭔지 모를 안도감에 공부나 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시간이 흐르고 로 메인에 올라갔고, 심지어 추천을 많이 받아서 추천 카테고리로 갔다! 조회수는 4000이 넘었다. 이런 평가를 받아서 신기했다. 그리고 거의 처음으로 다른 사이트에(네이버 카페 말고) 글을 올렸는데 좋은 덧글이 달려서 너무나 좋았다. 심지어 어떤 분은 쪽지까지 보내시며 앞으로도 내 글을 읽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괜찮은 일을 말하면 날아갈까 봐 보관해 두는 성격-_-) 자랑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3명에게만 말했다.-그리고 부끄러웠다. 왠지 모르겠지만 수줍은 느낌?!- 공부 같이 하던 여동생과 예진이 언니와 준형이 오빠이다. 3명다 내가 글 쓰는 거에 긍정 터지는 반응을 보여줘서 비밀 잘 지키라는 당부를 하며 기쁜 소식을 알려주었다. 3명 다 왜 비밀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음. 이란 반응이었지만, 입을 잘 단속하겠다고 했고, 준형이 오빠는 추천까지 눌러줬다. 그때 스마일이(추천아이콘) 77이 되었었다. ㅎㅎ 지금은 80도 넘었다. 이제는 내 글이 저 뒤로 넘어갔으므로 아무에게나 말하고 있다. <http://orbi.kr/0007924652>


 그리고 사건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병원의 모든 일을 전두지휘한 우리의 최여사님께(이모) 밥을 사드렸다. 이모 덕분에 무슨 의사선생님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모는 내가 암일까 봐 걱정한 게 너무 아깝다고 주장해서 그런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내가 가고 싶었던, 평소에는 비싸기 때문에 내 돈으로는 안가는 엘 올리브에 둘이서 갔다. 그래서 맛있게 먹고 왔다. 맛을 음미하며 나도 나 같은 조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심지어 이날 혼자 먹으려고 아껴둔 벨기안 사탕도 이모에게 선물로 줬다.) 내가 신사임당으로 당당하게 돈을 낼 때, 학생이 계산해요? 라는 지배인 아저씨의 동그란 눈을 볼 수 있었다. 훗.

  

 혹 덕분에 많은 걸 깨달았는데 그걸 다시 까먹고 있다. 그래서 다시 과거의 잘못을 반복할 것 같아서, 흔들릴 때 내 글을 내가 다시 읽어 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하고 싶은 말은 나는 팔팔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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