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서랑 [648028] · MS 2016 · 쪽지

2016-06-11 10: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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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방문기 as 수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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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에 엄마랑 아빠가 외삼촌을 만나고 왔다.

오는 길에 나에게 전화가 와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월요일에 외삼촌한테 가서 이야기도 하고 밥 먹기로 했어. 외삼촌이 오라더라.” 는 것이었다.

나는 놀러가는 줄 알고, 공부도 딱히 안 하고 싶은데 멍석 깔아주시는 기분이라 신나서 외삼촌에게로 갔다.

 

외삼촌이 3~4시 사이에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도착하니까 2시 55분 쯤이라서, 주변을 둘러봤다.

대박, 촌이었다. 밭도 있고 강도 있었다.

그게 신기해서 구경하다가, 병원의 본관으로 갔다.

들어갔는데 바로 정신과 이정표가 보여서 그쪽으로 갔다.

 

엄마가 오늘 아침에 레이스 치마를 입고 간다는 나를 보고

“니가 지금 정신과를 찾아가는데! 그런 거 입으면 미친년인 줄 안다.” 라고 하셨다.

그래서 평범하게 입고 갔다. (그냥 예쁜 옷이었는데...)

 

병원 천장에 붙어있는 간판을 따라가니 외삼촌 이름이 적혀 있는 방 앞으로 도착했다.

스스로 잘 찾아오는 나에게 감탄 좀 해주고....

신기해서 플래쉬를 팡 터트리며(안 터질 줄 알았다..)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엄마한테도 보내고 외삼촌에게도 보냈다.

나 도착했다. 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가 간호사 선생님이 나한테(뜬금없이 사진 찍고 그러니까?) 진료 보러 왔냐고 물어봤다. 헐.

“아니요.”라고 대답하고 대기실에 멍 하니 앉아 있었다.

이 상황이 웃겼다. 간호사 선생님이 ‘쟤는 정체가 뭘까?’ 라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더라.

그리고 몇 분 후에 외삼촌이 문 열고 나왔고 나랑 같이 들어갔다.

 

내가 오늘 여기에 온 초점이 오랜만에 보는 외삼촌과 하하호호 하고 노는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진료실에서 어떻게 왔나? 등의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엇 분위기가 뭔가 이상한 거다.

외삼촌이 평소처럼 공부이야기를 꺼내서 질문을 했다.

 

“공부 요즘 잘 하고 있나?”

 

“아니~~~~~ 묻지 마~~~”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근데 외삼촌이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그랬는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공부와 감정을 주제로 말을 하고 있었다.

외삼촌이 계속 질문을 했다.

끊임없이 했다.

게다가 내가 말하면서 “짜증났었어.” 라고 하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구체적으로 “슬펐니, 화가 났니, 억울했니? 뭐였어?” 라고 물어봤다.

이야기를 조금 하다 보니 내가 오늘 외삼촌과 상담을 하러 온거라는 것을 깨달았고

외삼촌이 작정하고 물어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다.

자꾸 부정적이었던 감정을 꺼내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고 그랬다.

그렇지만 20살인 나는 참았다.

1살만 더 어렸어도 울었을 것이다.

근데 보통이면 외삼촌이 내가 불평을 하거나 헛소리를 하면 바로 치고 들어와서 다다다다다 외삼촌 논리를 펼치는 성격인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한 마디도 안 하는 것이었다.

그냥 내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었다.

자기 생각을 하나도 언급 안했다.

계속 내 감정이나 생각을 끄집어내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외삼촌이랑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게 좋기도 했다.

다른 사람 같았다.

그래도 외삼촌이라는 걸 아니까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고,

간간히 보이는 웃는 모습에서 ‘엇 외삼촌이닷.’ 이런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외삼촌의 수많은 질문과 이어지는 내 말을 하고 나서

“외삼촌 오늘 이상해. 왜 외삼촌의 컨텐츠 있는 말을 하나도 안해? 자꾸 질문만 하고 내가 말한 걸 정리해? 나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거 처음 해봐.” 라고 묻기도 했다.

 

그랬더니 외삼촌이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뭐 친구랑 이렇게 말 하겠나? 그리고 컨텐츠 있는 말은 들을 사람이 준비가 되야 하는 거지. 나는 오늘 너의 컨텐츠를 들을 준비가 되었으니 니 하고 싶은 말을 다해라.”고 했다.

 

또 내가 오기 전에 궁금했던 외삼촌에 대한 걸 질문했을 때, 제대로 된 답변을 안 해줬다.

 

어마어마한 양의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나도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안날 정도다.

그러면서 나도 정확하게 몰랐던 공부가 불안한 이유를 찾았다.

a라고 생각했는데 말하다보니 b더라.

또 나쁜 감정이라 여겼던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느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걸리적 거리는 걸 하나씩 말해봤다.

입 밖으로 내고 보니 뭐 이래 하찮은 것들이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느낌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마주하면 하찮은 건 아니라고 말했다.

이때 외삼촌의 유일하게 공감을 했다.

 

“그렇지 뭐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말이 쉽지. 실제로 일어나서 뭐 운동이라도 해 보려면 쉬운 게 아니지.” 이렇게

그리고 여러 사람에 대한 이야기 했다.

길었다.

한 바탕 긴 대화를 하고 나니 피곤했다.

힘이 모지라더라.

그렇지만 처음에 대화가 힘들고 불편했던 것과는 달리 마음이 편안했다.

딱 내가 공부하기 좋아하는 안정적인 상태.

 

외삼촌이 어떤 기분이냐 물었을 때 미술관에 갔다 온 것 같다고 했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다보면 여러 감정이 들지만 그걸 다 격고 나면 굉장히 편안한 느낌이 든다.

그거랑 비슷했다.

 

내가 외삼촌보고 “좀 쉴래” 라고 하고, 물을 먹고 있을 때 외삼촌은 일을 보러간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병원이랑 학교 주변을 산책하러 갔었다.

그때 왜 미술관 온 거랑 비슷한 느낌이 드는 지 고민해 봤는데 나름 그럴듯한 해답이 나왔다.

외삼촌이 산책 하면서 오늘 무슨 이야기 했는지 생각하라고 했는데 이거만 생각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오늘 한 말을 다 복습하는 건 엉켜있는 실타래를 건드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미술관을 가는 걸 좋아하는 건 재미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한 작가가 느낀 감정을 그림에서 찾아보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도 몰랐는데 돌이켜보니) 그 작품의 느낌을 내 나름대로 섬세하게 떠올렸다.

그래서 때로는 행복해하고, 울기도 하고, 감동을 강한 펀치로 맞은 듯 한 기분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여러 작품을 접하고 나오면 정신이 뚜렷해지면서 기분이 적당히 좋은 상태로 변한다.

 

오늘 외삼촌이랑 이야기 하는 과정이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과 비슷했다.

외삼촌이 내가 귀찮고 짜증나니까 처박아 둔 부정적인 감정을 질문을 통해 선명하게 떠올리게 하면서 그걸 있는 그대로 보게 했다.

그러니까 ‘아 뭐야 이거였어?’ 이런 마음도 들고(외삼촌이 내가 한 이야기를 종합해서 친절하게 요약해줬다.), 그냥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한 감정들이 ‘아 그거구나~’ 하는 느낌으로 변했다.

계속 정리안한 상태가 지속되어 들어가기 싫은 방이 그 전에 내 감정이었다.

이제는 구체적으로 이러한 것들이 들어있다고 확인해서 별 부담 없이 방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기분이다.

그리고 불쾌한 느낌과 맞닥뜨릴 걱정도 안 해도 되고, 그냥 그렇구나 싶다.

 

여러 감정을 색안경 끼고 보거나 대충 1개의 감정으로 여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려 했다.

그리고 이 역시 미술관과 외삼촌과의 상담의 공통점이다.

그게 왜 정신을 평화롭게 하는 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다.

 

그런 생각의 꼬리를 물면서 하나의 꼬리가 더 생겼다.

‘내가 스트레스 받는 다고 느낄 때, 내가 내 감정을 너무 대충 여겨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나는 이런 이유로 슬프다, 또는 이런 정황인데 저런 걸로 오해받아서 억울하다. 이렇게 서술할 수 있는 상황을

 

아아아아아 짜증난다아아아아아아 로 밀어붙이고 더 이상 느끼기 싫어 팽겨쳐 둔 게 아닐까?

그게 쌓이고 쌓여 ‘스트레스 받았다.’ 고 두루뭉실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는 갑자기 열이 확 받을 때 그 느낌 말고 정황이나 이유를 최대한 솔직하고 뚜렷하게 떠올려 볼 거다.

그러면 분리 되서 편안해 지는지는 실험해 봐야 알 것 같다.

물론 하루에도 나를 몇 번이나 빡치게 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쉽게 그 실험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참 행복한 삶을 살고 있구나아아아아아아아

 

그렇게 좀 돌아다니면서 외삼촌한테 더 하고 싶은 이야기도 생각하고

예전에 외삼촌 졸업식 때 갔던 의과대학에 들어 가봤다.

들어가서 사진을 찍었고, 의대 준비하는 분에게 기 듬뿍 받으라고 응원하며 보내줬다.

의과대학을 보며 느낀 건 의사들은 좀 더럽다는 것이다.

정리 정돈을 안하고 미친듯이 쌓아둔다. (가운이나 책, 살림용품 등)

 

열심히 병원 구석구석을 탐색하다 보니, 외삼촌에게 연락이 왔다.

그래서 외삼촌 있는 대로 갔다.

외삼촌이 뭐했냐고 물어봐서 사진 찍은 것만 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의사들이 좀 지저분한 것 같다고 말했는데 외삼촌은 “뭔 말도 안 되는 소리하냐? 라는 반응이었다.

외삼촌이 퇴근하면서 나를 의국에 데려갔었는데, 거길 들어 가보니 내 말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짐이 엄청났고, 질서가 없었다. 으악.

60평 집에 가득 차 있는 짐을 억지로 30평에 집어넣은 듯 한 느낌...

 

그리고 차에서 외삼촌에게 산책하며 생각한 하고 싶은 말을 하며 밥 먹으러 갔다.

숙모도 오셨는데 너무 예쁘시다.

이번 달 말에 아기가 태어난다는 데 그것도 기대된다.

아직 태어나기도 전인 아기에게 사줄 레고 리스트를 작성해 둔 사람은 나 밖에 없을 듯..(절대 내가 가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고)

그리고 딸이라고 해서 더 좋다.

왜냐하면 프랑스에서 애기 옷집을 지나칠 때마다 너무 예뻐서 사고 싶었는데 사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생겨서 행복하다.

 

그리고 딸에 얽힌 사연이 하나 더 있다.

외삼촌이 꿈에 나와서 아기가 딸이면 기적이라며 활짝 웃었는데! 다음날 연락해 보니 성별이 딸로 바뀐 것이었다. (원래 남자라고 했다.)

그게 참 신기했다.

 

그리고 그 전까지는 숙모에게 부끄러워서 말도 못 건넸는데

이번에는 말하기가 수월했고 나중에는 그냥 말 할 수 있었다.

숙모가 외삼촌이랑 말하면 멀쩡한 사람도 엉엉 운다고, 안 울었냐고 물어보셨다.

이 말을 들으니까 그냥 이야기 하면서 엉엉 울어버릴 껄... 하며 후회했다.

괜히 참았다. 다음에는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전부 다 하고(준비를 해야겠다.) 눈물 나면 흘려야겠다.

그리고 숙모 배에 생명이 있는 게 신기했다.

 

보면 볼 수록 외삼촌이랑 외숙모가 잘 어울린다.

그래서 나도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오오.

엄마랑 아빠를 보면서 특히 아빠를 보며 흠.. 나름 한 번도 안 싸우고 잘 사는 것 같은데 로망이 없기에 이때까지 나에게 결혼은 하면 하고 말면 마는 거였다.

 

숙모가 나에게 외삼촌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셨다.

그래서 나는 외삼촌 빵구 엄청 많이 껴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직 신혼이잖아.

그래서 나름 점잖은 면모를 찾아서 답변한 게 수학 질문하면 섬세하게 답해주시죠. 였다.

외숙모가 한 번도 수학 문제를 안 물어봐서 그런 면이 있는 줄 몰랐다고 하셨다.

 

나는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냐고 물어봤다.

근데 외삼촌은 저번에도 니 물어보지 않았나? 라고 하고 뭐 그냥 하며 얼버무렸다.

숙모가 옆에서 외삼촌은 다른 사람들에게 길다가 마주쳐서 번호 받아서 사귀게 되었다고 뻥 친다고 했다.

생각해보니까 예전에 병원에서 만났다고 한 것 같기도...

다른 직원들에게 비밀로 하고 사겨서 숙모랑 외삼촌이 같이 찍은 사진은 잠금이 걸려있었던 기억이 난다. (사내연애...흐흐)

외삼촌이 여친 사진 보여준다면서 비번을 겹겹이 풀었었다. ㅋㅋㅋ

 

외삼촌이 사준 밥도 맛있었다.

고기랑 스파게티가 짱이었고 냉국수는 이가 시려서 잘 못 먹었다. (2O살 되니 온 몸에서 노화의 징후가 보인다.)

밥 먹으면서 외숙모가 외삼촌 핸드폰을 못하게 했는데(가족끼리 대화를 해야 한다고),

그때 외삼촌이 폰을 하는 이유가 주임 교수님이 퇴근했는지 안했는지를 체크하는 거라 뭔가 미안했다. (삼촌이 먼저 퇴근했으니까)

 

밥 다 먹고 외삼촌과 외숙모가 터미널까지 데려다 주셨다.

그리고 외삼촌이 외숙모 지갑에서 10만원을 꺼내서 나한테 주려고 했다.

내가 너무 많다고 거절했는데 외삼촌이 끝내주는 미소를 보내며 받으라고 해서

거기에 넘어가 어쩔 수 없이 용돈을 받았다. 그건 행복한 일이었다. 큭

 

외삼촌이랑 안녕하고 나니까 외삼촌이 오늘 했던 이야기를 엄마아빠한테 하는 게 걱정되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지 말라고 카톡 보냈는데, 웃기만 했다.

3번 연달아서 말하지마라고 보내니, 필요한 부분만 말하겠다고 한다.

제발 말 안했으면 한다.

근데 집에 오니까 엄마랑 아빠가 너무 궁금하다고 무슨 이야기 했냐고 계속 물어봤다.

이러다가 외삼촌이 전부 다 말하겠다 싶어서 내가 먼저 블로그에 선별적으로 글을 올린다.

엄마는 외삼촌이 보고를 안한다고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부산 와서 외삼촌에게 도착했다고 전화하고 숙모에게 아기 잘 낳기를 기원한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외삼촌에게는 “좋은 아빠가 되거라.” 고 아주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다음에도 또 놀러 가겠다고 했다.

 

나에게 외삼촌의 존재는 이런 거였다. 물론 전부터 외삼촌을 무척 좋아함.

갑자기 외삼촌과 눈을 마주치고 이렇게 말하는 거다.

“외삼촌,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 지 맞춰봐.”

“야 그걸 내가 어찌 알아?”

“왱? 이런 거 정신과에서 안 배웠어??”

 

근데 이제는 외삼촌이 정신에 대해 하는 일이 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멋짐)

그리고 외삼촌이 가운 입은 걸 처음 봤는데, 아무 생각 안 들었다.

근데 가운 벗은 걸 보니, 가운은 외삼촌의 엄청난 뱃살을 가리는 데 상당히 멋진 옷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외숙모가 아니라 외삼촌이 만삭 임산부 같다.

 

내 마음이 평화로워서 좋다.

그 전에는 연애를 시작하려는 두 명의 사람을 보면 짜증이 났었다.

저것들이 미쳤나? 어떻게 지금 썸을 타지? 이런 이유 없는 불만이 들었는데(나랑 아무 상관없지만-내 친구가 작년에 길 가던 커플을 보면 핵빡친거랑 비슷함.)

지금은 걔들을 보면 귀엽다.

평화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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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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